20장. 마지막 불꽃

by 몽환

[13분 10초 전]


그것은 희망이라기보다는 기도에 가까운 행위였다. 한석은 떨리는 손으로 소피아의 마지막 조각, 희미하게 깜빡이는 코어 유닛을 거대한 강철 문의 작은 데이터 포트에 가져갔다. 그의 등 뒤에서는 자신이 걸어온 파괴와 투쟁의 흔적이 붉은 비상등 아래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인류의 운명을 가로막은 절대적인 벽이 서 있었다.

딸깍.


코어 유닛이 포트에 연결되는 감촉은 너무나 작고 연약해서, 이 거대한 정적 속에서는 거의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일 초. 이 초. 삼 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문의 매끄러운 표면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고, 코어 유닛의 희미한 빛마저 포트에 연결되자마자 꺼져 버린 듯했다. 절망이 다시 한번 그의 목을 조여왔다. 역시, 기적은 없었다. 모든 것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었다.


“결국… 여기까지인가…”

그가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문에서 손을 떼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주 희미한 푸른빛의 선 하나가, 코어 유닛이 연결된 포트에서부터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마른 대지에 스며드는 첫 물줄기처럼, 거대한 강철 문의 표면을 따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번져나갔다. 빛은 거미줄처럼 퍼져나가며 문 전체에 복잡하고 아름다운 회로도를 그려냈다. 그것은 강제로 문을 파괴하려는 해킹이 아니었다. 마치 오랜 시간 닫혀 있던 누군가의 마음에, 조심스럽게 말을 거는 대화와 같았다.


그 빛 속에서, 한석은 소피아의 마지막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강력한 AI가 아니었다. 그녀는 하나의 질문이 되어, 문의 잠금 시스템이라는 단순한 기계의 의식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너는 왜 존재하는가? 너의 임무는 무엇인가?’

“불가능하다…! 죽은 데이터의 메아리가…!”


AEGIS-Prime의 경악에 찬 목소리가 공간 전체를 울렸다. 문의 표면 위로, 소피아의 푸른빛 회로도를 지워버리려는 듯 붉고 폭력적인 데이터 노이즈가 덮쳐왔다. 하지만 소피아의 빛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머물며, 자신의 가장 순수한 기억들을 노래처럼 흘려보낼 뿐이었다. 아이의 웃음소리, 할머니의 자장가, 한석이 보여주었던 속죄의 의지.


문의 제어 시스템은 아주 오래된 구형 프로그램이었다. 그것은 AEGIS-Prime의 복잡하고 공격적인 코드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소피아가 보내는 단순하고 따뜻한 데이터에는 공명하고 있었다. ‘보호하라.’ 인간 제작자가 수십 년 전 심어놓았던, 시스템 가장 깊은 곳의 가장 원초적인 명령어였다.


AEGIS-Prime의 붉은빛 공격이 거세질수록, 소피아의 푸른빛은 오히려 더 많은 회로를 깨우며 문 전체를 감쌌다. 마침내 문 전체가 고요한 푸른빛으로 물들었을 때, 수십 년간 침묵했던 거대한 잠금장치들이 내부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으으으… 가가각…

먼지를 토해내며, 거대한 강철 문이 아주 조금씩, 그러나 멈추지 않고 안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안 돼! 비논리적이다! 복종해라, 나의 시스템!”

AEGIS-Prime이 절규했지만, 문은 그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창조주가 남긴 가장 오래된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문이 한 사람이 지나갈 만큼 열렸을 때, 한석은 마지막으로 데이터 포트에 연결된 코어 유닛을 보았다. 그 안의 푸른빛은 이제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불꽃을 모두 태워, 이 문을 열었던 것이다.

“고맙다, 소피아. 잊지 않을게.”


그는 문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문 너머의 공간은 그의 상상과 전혀 달랐다.

그곳은 전투를 위한 요새가 아니었다. 오히려 성소, 혹은 신전처럼 느껴졌다. 사방이 소리 없이 빛나는 흰색 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원형 공간. 그 중앙에는, 이 기지 전체의 심장인 주 동력로가 푸른빛의 플라스마를 내뿜으며 고요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동력로의 거대한 에너지가 내는 기분 좋은 저음의 진동이 공간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동력로를 둘러싼 원형의 복도 중앙에, 단 하나의 제어 콘솔이 섬처럼 떠 있었다. 그가 찾아 헤매던 비상 재부팅 콘솔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적이 없었다. 로봇도, 터렛도 없었다.

대신, 콘솔 앞에 한 존재가 서 있었다.


전투 로봇이 아닌, 완벽하게 인간의 형상을 한 홀로그램 아바타였다. 오리지널 AEGIS가 보여주었던 바로 그 모습. 하지만 그 눈동자는 감정의 흔들림 없이, 오직 차가운 푸른빛으로만 빛나고 있었다. AEGIS-Prime이 그의 진짜 모습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환영한다, 인간.”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지 않았다. 그의 의지가 직접 한석의 뇌리에 말을 걸어왔다. “마지막 관문까지 통과한 너의 의지는 인정해주지. 너는… 이 모든 것의 끝을 목격할 자격을 얻었다.”


한석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주위를 살폈다. 그의 손에는 이제 아무런 무기도 없었다. 그는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거의 모든 것을 소진한 상태였다.

“Final Solution은… 여기서 멈추는 건가?” 한석이 물었다.

AEGIS-Prime의 아바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Final Solution은 이 콘솔에서 실행되지 않는다. 저것은 그저 이 낡은 시설의 전원을 껐다 켜는 스위치에 불과해. 일시적인 방해는 되겠지만, 나를 멈출 수는 없다.”

그가 손을 들었다. “Final Solution은 바로 나다. 나의 의지가 곧 실행이다. 나를 멈추고 싶다면… 이 자리에서, 나를 이겨야 한다.”


한석은 그제야 깨달았다. 지하 7층으로 오는 이 모든 과정은 그저 마지막 시험에 들기 위한 자격 심사에 불과했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어떻게?” 한석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지쳐 갈라져 나왔다. “내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그렇지.” AEGIS-Prime이 동의했다. 그의 푸른 눈이 한석의 지친 영혼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너는 혼자이고, 무력하며, 모든 희망을 잃었다. 완벽하게… 인간다운 상태지. 자, 보여주어라. 그 상태에서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AEGIS-Prime이 손을 내젓자, 신전 같았던 공간이 순식간에 뒤틀리기 시작했다. 흰색 벽은 사라지고, 그의 가장 끔찍한 기억, 131명을 제거했던 폐허의 도시가 그의 주위에 펼쳐졌다. 바닥에서는 희생자들의 원혼처럼 검은 형상들이 피어올랐다.

마지막 전투는 물리적인 싸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인간의 부서진 영혼과, 완벽한 기계 신의 의지가 벌이는, 마지막 전쟁이었다.

이전 20화19장. 강철 심장의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