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나를 깨우며 마리나는 오전 중으로 시청에 들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녀는 이미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해놓은 상태였고 시청에서 일을 본 뒤에는 시내를 구경하고 함께 장을 보자고 했다. 나를 아들처럼 챙겨주는 그녀의 수고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거주지 등록은 금방 끝났다. 시청 직원은 서류를 대충 훑어본 뒤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내가 독일에 온 지 4일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어딘가 비현실적이고 허무맹랑하게 느껴졌다. 역 앞의 쇼핑몰에서 장을 보고 집에 돌아와 점심을 준비하니 벌써 2시였다.
차를 마시고 마리나와 함께 니콜라스의 물건들을 치우는 중에 반디와 유르겐이 순차적으로 도착했다. 창고에는 수많은 박스와 오래된 가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는데 마리나는 자신이 필요한 물건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녀와 유르겐이 떠난 뒤 나는 혼자서 짐을 풀고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책 몇 권과 노트북, 향수 따위의 나에게 익숙한 물건들을 꺼내놓자 비로소 그 방이 조금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 물건들은 서로 어떤 보이지 않는 막을 형성했고 나는 이불과 함께 그것을 몸 위에 덮었다. 그리고 잠들기 전 나는 더 이상 여행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