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장소에 대한 기억은 거의 비슷한 양상을 띠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둘 모두 일종의 정신적 도피처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좋았던 장소를 다시 찾아갔을 때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처럼 좋았던 책을 다시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기억은 병합되고 가장 최근의 기억이 가장 강력한 것으로 남기 때문에 이것은 언제나 위험한 모험이다.
기억을 아름답게 꾸미고 화사한 안개 같은 것으로 채우는 것은 그리움일까? 그렇다면 그 그리움은 충족되어서는 안 되는, 언제나 그리움으로 남아 있어야만 하는 그리움일 것이다. 어쩌면 바로 그 이유에서 좋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도피처는 안타깝게도 더 이상 나에게 도피처가 되어줄 수 없다. 그곳을 그렇게 화사한 안갯속에 내버려 두는 것이 현명한 일일지 모른다.
들뢰즈에 의하면 사건과 생성의 표현은 명사의 실체적 형식보다는 동사와 부정태의 형식과 관련된다. 보르헤스가 묘사하는 틀뢴의 언어에는 아예 명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공간의 안무에서 동사로서의 건축. 고진은 건축은 사건이라고 했다.
고정된 것의 움직임을 시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생성은 존재와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 방식과 관계된다. 여기서 헤라클레이토스-니체와의 차이;
존재를 조정하거나 변형하기 위해서 존재를 가로지르는 생성 : 헤라클레이토스-니체
존재의 조건으로서의 생성, 생성의 합계로서의 존재 : 들뢰즈
들뢰즈에게 사고는 본질적으로 리좀적인 것이다. 그는 인위적으로 틀 지워진 사고의 구조를 전복시키려 한다. 발레리의 사유의 나무와 비교. 마찬가지로 들뢰즈에게는 원래 욕망이 있고, 욕망을 층화·영토화한 것이 제도·규율이다. 생명 → 유기체, 무의식 → 의식, 분자적 → 몰적. 해변이 먼저 있고, 그것을 포장으로 덮는다. (도로포장 아래 해변이!)
흐름과 강도의 상태가 가장 원래의 상태이고 영토화, 층화, 주체화는 고착화의 상태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미 영토화된 유형을 다루는 보자르식 건축과 현실적 심급에서 몰적인 은유의 상태로서만 발현되는 근대 건축이 비판된다. 반면 현대 건축에는 잠재적 심급에서의 특이성들의 미분적 관계를, 흐름과 생성 자체를 즉개적(스피노자의 thisness)으로 육화시키려 한다는 측면에서 들뢰즈가 추구하는 전복적인 성격이 있다. 관계를 통한 위상학적 구성이 전체를 지배하고 건물은 리좀적인 것이 된다. - 비판할 것
모든 ‘-되기’의 분자화. 특이자들의 운동에 의해서 몰적인 구성체는 분자적인 것이 되고, 더 미세한 입자로서의 분자적인 상태는 결국은 지각 불가능한 흐름과 강도만이 남은 상태가 된다. 이러한 미세한 표변의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들뢰즈는 섬유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생성은 미분적이고 발생은 적분적이다.
분자적 인간의 동물 감성적 소립자에 의한 동물-되기. 재현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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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철학에서 세계의 상을 추구한다. 우리는 철학에서 가장 자유로운 기분을 느끼게 된다. 즉, 철학에서 우리의 가장 강한 충동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고 느낀다. 내 경우에도 그러하다. N
“자기 자신이 그의 유일한 동시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