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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석범 Apr 04. 2022

2022. 4. 3 일

아이라인을 진하게 칠한 여자가 핸드폰을 들어 보이며 파워 소켓이 있는 옆자리에 앉아도 되는지 물었다. 유럽인들은 개인 공간에 대한 개념이 없다.  인류학자는 미국인들에게 용인되는 대화 거리를 1.2미터, 유럽인들의 거리를  반인 0.6미터로 규정했다.  거리는 2미터다. 그러나  외에 나는 거절할 만한 정당한 사유가 없었기 때문에 여자는 핸드폰 충전기를 꽂은   옆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일에만 신경 쓰며 하던 한량 업무를 계속하려는데 여자가 가방을 뒤지더니   권을 꺼내 반듯하게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권을 아무렇지도 않게 펼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약간 감동하여 곁눈질로  내용을 훔쳐봤는데 여자가  읽으려는 장의 제목은 ‘펜은 키보드보다 강하다였다.  허접함은 약간 김빠지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호기심은 강화됐고 곧바로 다음과 같은 그럴듯한 추론이 떠올랐다.  여자는 작가 지망생이다. 작가 지망생을 위한 자기 계발서를 읽는 어리숙함이 바로  사실을 증명해 준다. 본인이 작가가 되는데 실패한  계발서의 저자는 지망생들에게 토로한다. 키보드로 치지 말고 윈스턴처럼 크림색 종이에 진짜 펜촉으로 쓰라고. 모든 위대한 작가들이 그렇게 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아마도  노스탤직한 장은 격앙된 어조로 크림색 종이의 생생한 질감과 마호가니 펜대의 부드러움, 무소불위의 정교한 펜촉 끝에서 실개천처럼 흐르는 프러시안 블루의 시성을 찬양할 것이다.  모든 키치는 어쨌든  궁극적인 지향점의 고귀함을 통해 용서될만하다.  여자가  월계관의 과업을 이루어내는지는 오로지 역사만이  것이다. 이제 나는  즐거운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아주 간단한 확인 조사만 하면 된다. 그러나 검색 결과로  책의 내용은  상상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다음은 아마존에 올라와 있는  절망적인 서문의  문단이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왓츠앱, 스냅챗, 틱톡...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피드가 되었을  아니라 고해성사의 장이 되었다.  책은 스크롤 시간을 줄이고 자기 성찰의 시간을 늘리도록 도와준다. 예리한 질문과 다양한 사고 실험을 통해 당신은 남의 시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해방될 것이고 새로운 것들을 배우게  것이다. 타인에 대한 감정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대신, 개인적으로  자신에 대한 감정을 선언한다고 상상해 보라!’  읽는 것은 고역이다. 대표로 인용되어 있는 리뷰는  틱톡 유저의 것이다. “ 책은 저를 웃고 울게 했고, 기쁨으로 가득 차게 했고, 제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어쩌면 실제로 눈물을 흘리며  라이브 리뷰를 자신의 피드에 올렸는지 모른다. 세계가 하나의 피드가  것도 모자라 이제 우리는 정녕 그것에 대해 책으로까지 쓰고 읽어야 하는 지경에 다다른 것인가?  미친 세계의 문제는 그것의 공개적인 고해성사 자기 성찰의 매개가 되었다는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유의 계발서는 자가당착에 빠진다. 오히려 우리는 하찮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모든 감성팔이의 완전한 중단을 선언해야 한다!  책이 우리들의 정신병에 대한 무용한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음은  옆의 여자가 증명해 준다.  작가 지망생은 방금 책의 표지를 찍어 자신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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