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4. 8 금

네거티브인 공간은 이미 주어진 포지티브의 규격들을 조합함에 따라 그 잉여분으로 나타난다. 포지티브가 정합적이고 단순할수록 네거티브는 분명하고 자유롭다. BEA가 모듈 구조이기 때문에 이런 원리가 강조되어 나타나는 경향도 있다. 포지티브는 거의 설비적인 것과 기능적인 것, 즉 실제적인 것과 관계가 있다. 그리고 요즘 일을 하면서 느끼는 가장 큰 즐거움은 더 이상 탁상공론이 아닌 바로 이런 실제적인 것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에서 온다. 그건 곧 정합성에 대한 고민이며 정합적인 것은 성취된다면 가장 먼저 가시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게 설계의 궁극적인 목적일까? 조합하려는 의지는 정렬시키려는 의지와 동일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HFS는 그 좋은 연습이었던 것 같다. 내가 유추하기로 십이 나를 원했던 (정말로 그게 사실이라면) 이유는 HFS가 다소 강박적인 정리벽을 표명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십은 그 후로 언젠가 나에게 너는 평면 건축가야라고 말했는데 그건 내 역할을 한정하려는 의도라기보다 내 기질에 대한 하나의 진술이었다. 십도 정합성을 입에 달고 사는 평면 건축가다. 우리는 때때로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며 어떻게 이 선을 저 선과 같은 것으로 만들지, 어떻게 이 선을 저 선과 직각으로 만나게 할지 따위에 대해 토론한다. 기하학은 실로 묘한 관행이다. 나는 그것이 주는 아름다움은 알지만 그 의미는 알지 못한다.

어쨌든 지난 한 달 동안 팀원들과는 금방 친해졌고 또 내 역할은 잘 확립된 듯하다. 특히 십, 얀과는 아주 편하게 소통할 수 있고 그들 역시 나를 좋아해 주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마치 세미나처럼 설비 등의 회의를 매주 서너 시간씩 부담 없이 듣고만 있을 수 있는 것 역시 호사임은 분명하다. 며칠 전 기밀정보 취급 인가를 위해 열세 장짜리 양식을 빼곡히 작성하면서 비로소 프로젝트의 일원이 된 게 실감이 났다. 부모님의 고향을 비롯하여 내가 성인이 된 후 지금까지 거주했던 모든 주소지와 다녔던 학교들, 일했던 곳 등을 빠짐없이 기록해야 했다. 이 까다로운 Ü2 심사는 앞으로 길게는 6개월이 걸린다고 하고 연방건설청은 혹시나 내가 평면도를 러시아 첩자에게 빼돌리지는 않을지 범죄기록 같은 것들을 샅샅이 뒤져볼 것이다. 이건 분명 특이한 경험이다. 독일에 공부하러 오면서 어느 건축학도가 그의 첫 건물이 독일 대통령의 집무실이 될 거라고 생각하겠는가. 처음 십이 프로젝트를 소개해 줬을 때 난 그저 이건 후에 독일 유학생의 재밌는 에피소드가 될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 유학생은 이 이야기를 하게 될 때쯤 건축가가 되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