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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석범 Apr 19. 2024

2024. 4. 17 수

복귀 직후 나랑 바통터치를 하고 애인이랑 볼리비아로 떠난 루에게서 파사드를 넘겨받았다. 팔레트는 거의 결정된 상태에서 전체적인 그림이 지지부진하고 있던 모양이다. L은 패밀리들을 근본적으로 교정하고 싶어 했고, M의 초기 차콜 드로잉의 컨셉과 코 부분에서 밀도가 높아지는 새 아이디어까지 제대로 반영하려면 몇 달간 붙어 있던 루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결국 모든 색을 완전히 다시 배열하는 수밖에 없었다. 끈질기게 회피해 온 일이지만 막상 시작하니 해보지 않았던 생각을 하게 된다. 파사드 패널리제이션의 개념화(사물로서의 파사드)가 BSW의 엑셀을 통해 이루어졌던 것처럼. 건축에서 색은 어쨌든 도덕보다는 개인적인 기호의 문제지만 ML 밑에서 일을 하면서도 그들의 신조나 다름없는 폴리크로미에 싫증과 무관심으로 일관한 데에 약간의 부채의식이 있었다. 그 빚을 갚는 마음으로 2,200개가량의 셀들에 일일이 색지정을 하고 있을 때 그레고리와 아시아가 루의 오래전 입면도(당시 훨씬 파랗고 단조로웠던)를 들고 와 어떻게 희미하게 반짝거리며 번지는 효과가 나는지를 물어본다. 배경의 세라믹과 보색 관계인 난간 때문이라고 하니 포토샵으로 블러 효과를 준 건 줄 알았다고 한다.

그렇게 어딘가 비물질적인 이 컨셉을 우리는 고스트라고 불렀다. 얼마 전 문득 그 초점이 흔들린 사진 같은 효과를 보며 그 고스트가 리히터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는 모든 것을 동등하게, 모든 것을 똑같이 중요하고 똑같이 중요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블러 처리를 한다고 했는데 푸틴의 5연임이 확정된 다음 날 아침 마침 리뷰 중이던 우리를 불쑥 찾아온 베라는 바로 이런 때에 이 파사드가 표방하는 메시지가 얼마나 시의적인지를 흥분된 어조로 칭송했다. 연신 ‘믿을 수 없을 만큼 민주적이야!’를 반복하면서. 이 28색의 민주주의는 자신의 유령으로 사무실 창문의 전체주의를 와해시키고 건물 표면을 하나의 이미지로 흡수한다. 그리고 그 뒤로 한 체제로서의 건물은 녹아 사라진다.

이 현상에 대해 ML은 그들의 미완성 사전에 다음과 같이 썼다: ‘가벼움 - 폴리크로미를 적용하면 다양한 색을 통해 더 나은 효과를 얻을 수 있으며, 견고함이 시각적 비물질화에 이르는 지점까지 나아갈 수 있다.’ 메를로-퐁티는 주변과의 관계를 통해 그 자신으로 있게 되는 색의 본질에 대해 비슷한 설명을 시도한다: ‘그것은 동시적인 것과 연속적인 것을 아우르는 어떤 결절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가시성의 구체화이지 원자가 아니다.’ 이 결절점들은 동시적이면서 연속적인 것으로서 안개이자 그물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이 두 단어가 이 파사드를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색의 안개이면서 동시에 색의 그물로서.

SH가 이번에 초반에서 연 전시의 제목은 Drawing in Space인데, 이에 대해 소개 글을 쓴 예술비평가는 건물의 폴리크로미는 다름 아닌 공간 그린 그림이기 때문이라고 그 의미를 설명한다. 그렇다면 공간 그린 그림을 전시하는 건축 드로잉 박물관에서 이 전시를 위해 이례적으로 건물 사진을 걸어놓은 이유도 이해된다. 그것 자체가 그림이 된다는 나이브한 주장은 한편으로 수긍이 되는 것도 같지만 역시 ‘파사드는 그림이다’라는 자의적인 태도는 어딘가 과잉 자기 본위의 냄새를 풍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점차 이 파사드를 입면도가 아닌 하나의 그림으로 인지하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것은 위에 하나의 이미지라고 쓴 것과 같은 의미에서 일관성 있고 전체적이다.

그것은 은유와 같은 작용을 한다 - 누군가는 민주주의를, 누군가는 유령을 본다.

그것은 시각적, 미적으로 즐거움을 준다.

그것은 폴리크로믹하다.

마지막 이유는 그런 의식적인 색 사용이 배제된다면 자연의 모든 것이 그림이라고 주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ML은 그들의 사전에서 다색성에 대해 색 배합과 배열의 계획과 의도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 의도라는 것은 결국 건축가의 예술적 의지이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파사드의 다색화는 건축가보다는 화가의 작업이다. 그리고 화가는 당연히 도면이 아닌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다.



ML의 사전을 뒤적거리다 건축에서의 색에 대한 그들의 관점이 87년 찬디가르를 다녀온 뒤 화이트 큐브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본격적으로 해방된 것을 알게 됐다. ‘색은 건축과 그 효용 사이의 누락된 결절점을 충당해 주는 축제의 상징과도 같았다.’ 백색에 대한 ML의 다음 주장 역시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다. ‘Are these not just tired attempts to infuse an ordinary programme with imaginary spirituality, the application of a cliché whose original is long lost? White is used indiscriminately - a choice without controversy. Those ancient Greek sculptures we admire today as classic works of art were not white when they were made. Ancient spirituality employed bright colour - livelier than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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