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과 철학적 사유
“물음은 사유의 경건함이다.” 하이데거는 당대 철학자들에게 물음을 던지라고 선언한다. 그는 끊임없는 사유의 과정으로 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가의 반열에 오른 사람 중 한명이다. 현대 철학자는 모두 하이데거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닐 정도로 하이데거는 현대 철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은 대사상가가 어떻게 나치에 동조할 수 있는지는 많은 논쟁을 촉발시켰다. 1987년 파리아스(V. Farias)의 [하이데거와 민족사회주의] 책이 세상에 공개됐을 때 수많은 논쟁이 촉발 됐던 것은 위의 배경들이 서양 철학계의 금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2가지 가설이 있다. 하나는 나치에 협력했던 것은 당시 대학을 지키기 위함이며 나치의 압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함이라는 논리이다. 또 다른 하나의 가설은 하이데거가 독일 나치즘 사회민족주의에 자신의 사상과 근친성을 느꼈다는 것이다.
필자는 양적자료가 하이데거의 나치 협력이 단순한 실용주의적 이유가 아니었다는 데 손을 들어주고, 더 중요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 2번째 가설에 더 집중할 것이다. 2번째 가설에 대한 판단 근거는 다음과 같다.
“하이데거가 나치에 참여한 것은 나치를 통해서 자신의 대학 개혁 이념을 실현하고 민족 지도자를 양성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고 믿었기 대문이다. 하이데거의 나치 참여가 외적인 상황에 의해서 강요된 것이 아니라 이처럼 적극적이었을 경우, 하이데거의 나치 참여를 그의 사상과 무관한 것으로 보기는 힘들어진다.” 가다머 역시 하이데거의 나치 참여가 그의 사상과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사상가에 대한 그와 같은 변호가 얼마나 모욕적인 변호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고 지적한다.
이로써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밝혔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이론은 하이데거의 사례에 도입할 수 없다. 그는 사유가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유가 나아가는 방향성에서 총체적 사고의 오류가 생겼던 것이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을 사고’할 만큼 충분히 냉정한 것이 아닌, 사고하지 않는다는 점 을 지적한 것과는 다르게 하이데거는 오히려 충분한 사유를 통해 나치즘에 협력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보인다. 하이데거가 충분한 사유의 과정을 통해서 진정으로 나치즘에 협력하고 민족사회주의를 추구했다면 그는 어떤 부분에서 실수를 했던 것일까? 또한 사유의 실천 방향성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우리는 현실세계를 살아감에 있어 어떤 사유의 과정을 통해 총체적 진실을 파악하고 최악의 경우를 피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시간대에서도 충분한 사유가 있더라도 진위여부를 파악하기 힘들고 총체적 진실로 나아가는 사고 자체가 차단되는 경우가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러시아가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사례로 이를 살펴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극도의 흥분상태에서 발생한 전시상황은 ‘총체적 사건’을 만들어냈다. 국제질서가 재편성되고 있다. 현실 국제 정치에서 정치적 다원주의는 사라지고 ‘총체적 사건’에 관련된 대답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러시아측 프로파간다의 원초적인 성격이나 ‘언론에서 전쟁을 금지어로 정하고 이를 어기면 징역형에 처한다’는 법안, 크렘린궁의 정책 등은 서구 언론에 그들의 대안 모델이 가진 ‘미덕’을 말할 기회를 제공했다.” 현재 러시아의 프로파간다는 명확하다. 우크라이나에서 나오는 정보를 거짓으로 규정하고 자국민에게 거짓보도를 일삼는다. 하지만 서방세계는 다를까?
“얼마 전 즈미이니섬 수비대가 “러시아 군함은 꺼져라!”라고 응수한 뒤 섬을 지키려다 전사했다”라는 뉴스가 퍼졌다. 실제로는 즈미이니섬 수비대가 생존해 있지만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가자 정보는 <워싱턴 포스트>(2월 25일)을 비롯해 대한민국 5대 언론사까지 전세계에 반복 보도됐다.
또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메타(구 페이스북)는 (러시아측 보도는 전쟁을 부추기고 가짜뉴스이기 때문에 게재를 금지하도록 통제됨에도) 일부 국가의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사용자가 러시아 군대와 블라디미르 푸틴에 대한 폭력을 요구하는 내용은 허용했다. 메타 관계자는 ‘정치적 표현의 형식’에 대한 규칙을 완화했다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했지만, 러시아는 침략자이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폭력은 정당하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크라이나는 확실하게 여론을 지배하고 있다. 젤렌스키의 영웅적 수사와 함께 자유민주주의 수호자인 서방국가들은 하나로 뭉쳤다. 하지만 정말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1999년과 2003년, 서방국에서 세르비아와 이라크를 침공했던 것과는 다르게 국제 여론은 러시아에 대한 비난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물결이 강해지고 있다. 이 결과에서 피해자와 승리자는 누구일까? 피해자는 당연히 집에 포탄이 떨어지는 우크라이나 국민들과 얼떨결에 서방세계에 배척당하고, 전례가 없는 경제제재에 시달리게 된 러시아 국민들이다. 그리고 실질적 수혜자는 미국과 유럽이다. 록히드마틴 등 미국의 군수업체는 전쟁이 터지자마자 폭발적인 주가 상승과 더불어 그간 아프가니스탄, 미얀마, 시리아, 이라크 등으로 점철됐던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의 실패를 되살려냈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떨어져가는 지지도를 급반등할 기회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사용했고, 독일과 일본은 군비 확산을 공고히 했다. 앞으로 전쟁이 각국의 이해관계로 인해 장기화될 것이 확실해진 현재의 시점에서 전쟁의 확산은 예측할 수 없는 범주로 다가서고 있다.
전시상황의 특수성은 우리가 신용할 수 있는 정보가 없다는 것에 있다. 은폐된 정치적 이익관계와 ‘총체적 위기’ 상황이 함께하고 있다. 우리는 1, 2차 세계대전과 비슷하게 인류가 파멸로 갈 수 있는 어떤 문턱에 와있다. 지성의 파멸과 인류의 파멸이 올 수 있는 기로에 서있는 우리는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주의하는 것은 물론이고 총체적 사유의 방향성까지 생각해야 한다. 특정 선택과 가설로 유토피아적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는 생각은 잠시 삼가는 것이 좋다. 어떤 선택에서 발생될 파생효과는 현재 예측할 수 없는 범주에 와 있다.
‘노이노르는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게 된 것은 독일 민족이 오랫동안 가져왔던 신화와 환상 그리고 야망 등에 호소한 덕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히틀러에게 권력을 안겨준 ‘국가 운동’과 ‘천년왕국’의 사상은 19세기와 특히 20세기에 있어서 독일 민족의 발전을 직접 간접으로 싸고 돈 여러 가지 사조, 운동, 환상, 신화의 귀결이었고 독일인의 야망, 꿈, 악습, 타락의 총합이었다. 총합이라고 했지만 혹은 카타르시스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하이데거 역시 이런 신화와 꿈속에서 성장했고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나치에 가담했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하이데거가 가지고 있던 신화와 꿈은 현재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가 한순간 자제력을 잃고 전시상황에서 군국주의적이며 전체주의적으로 작용할 때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서 ‘총체적 위기’를 현실화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후설의 ‘선험 현상학’에서 어떠한 선이해도 가지고 있어서는 안된다는 철저한 태도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 현재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담론을 잠시 판단중지 해놓고 현재 사태를 파악해야 한다. 또한 순수의식에서 머무는 것이 아닌 현재 시점에 적용을 시켜 탈 이데올로기적 화법으로 대비를 해야 한다. 우리는 현재 상황에서 기존 패러다임을 잠시 해체시킨 후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은 그런 상황이다. 이성의 몰락 시기였던 1, 2차 세계대전과 그 시공간에 존재했던 아이히만, 하이데거의 실수를 곱씹어 보고 해결책을 강구해야만 한다.
[참고문헌]
1) Die Kunste im technishen Zeitalter. Dritte Folge des jashrbuchs “Gestalt und Gedanke”. Hrsg. von der Bayerischen Akademie der Schonen Kunste, Munchen 1954; auch in: Martin Heidegger, Vortrage und Aufsatze, Pfullingen 1954, 44. 2)V. Farias, Heidegger und der Nationalsozialismus, Frankfurt a. M. 1989.
3)이재성. 철학자와 나치: 하이데거의 철학적 자율성을 어떻게 이야기 할 것인가?. 사회와 철학 연구회 논문집, [사회와 철학] 제11호 2006. 4)의 151-162p
4)박찬국. “하이데거와 나치즘”. 문예출판사. 2001.
5)Hans Georg Gadamer, “Oberflachlichkeit und Unkenntnis: Zur Veroffentlichung von Victor Farias,” in: Antwort, Martin Heidegger im Gesprach, G. Neske und E. Kettering(hrsg.), Pfullingen, 1998, 101쪽.
6)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6.10.10.
7)피에르 랭베르 “서방 언론, 우크라이나의 ‘가짜 뉴스’에 눈 감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2. 04. 04.
8)강태호 <한겨레> 전 외교전문기자 “우크라이나 ‘전쟁의 정치’와 거짓 깃발(False flag)’.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2.04.04.
9)J. F. Neurohr, 전남석 역, [제 3제국의 신화: 나치즘의 정신사], 한길사, 1986, 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