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상전략
1. 들어가는 글 – 배경
노순택의 프로필을 보면 길바닥에서 사진을 배웠다는 표현을 쓴다. 그는 사진을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이 아니다. 전공은 정치학이었다. 본인의 이야기로는 현실정치에 관심이 있기 보다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작동원리를 혹시 배울 수 있지 않을까?’라는 궁금증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특히 학생시절 북한괴뢰집단에 대한 얘기를 지긋지긋하게 들어왔다고 하는데 그것이 그에게 호기심을 품게 만든 것 같다. 분단체제는 무엇인지, 그리고 북한괴뢰집단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가 대학을 다닐 시절은 노태우 정권 후반부였는데, 군부 정권이 곧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때 많은 사건이 벌어졌고 많은 시위가 있었다. 당시 강경대 열사가 등록금 인하를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백골단에게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했고 그것이 노순택 작가에게 크나큰 충격을 줬다고 회고한다.(MMCA 작가와의 대화 중) 그때 세상의 무서운 단면, 이해하지 못할 사회시스템의 작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노순택은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노순택은 ‘사실상’ 대학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온다. 그 이후 학교 선배의 추천으로 작은 신문사에서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신문사에서 다사다난한 일을 겪었다. 편집국의 횡포를 통해 기사를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황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IMF 구제금융 사태 속에서 그는 해고된다. 이후 아는 선배들과 스튜디오를 하기도 하지만 결국 나오게 됐고, 월간 <말>의 사진팀에 들어간다. 이곳에서 매향리 폭격장 실태를 취재하다가 군사시설보호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았는데, 이때 2심에서 선고 유예 판결을 받았다. 회고하길 좋은 판사를 만난 덕이었다고 한다. 그 이후 그는 어떠한 갈증이 있었던 것 같다. 사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목마름으로 대학원에 진학을 결정한다. 하지만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결국 사직서를 낸다. 그리고 대학원도 관둔다. 노순택의 사진을 향한 갈증은 대학원이 해결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노순택의 개인작업을 향한 시기가 열리게 된다.
2. 노순택 사진의 표상 전략
1) 세상의 작동원리에 대해
노순택의 특수한 표상전략과 사진의 접근방식은 사회시스템 작동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언급해야 할 개념이 오늘의 초현실인데 현실이 비현실적으로 작동할 때, 사진은 대단한 조작이나 기술, 연출에 의존하지 않고 초현실을 재현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이 어떻게 초현실적일 수 있는가? 초현실적 상황의 예를 들어보겠다. 1900년대 초 루이스 하인이 통조림 공장에서 찍었던 아이들 사진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모두가 생각한다. 그러나 그 사진은 그리고 사진 속에 아이들이 겪었던 현실은 실재했다. 그 어린 아이들이 손가락이 절단되고 다치는 상황속에서도 일하는 모습들은 기이하다 못해 판타지 같다고 느껴진다. 이것이 초현실이다. 이런 초현실적 상황을 노순택은 놓치지 않는다. 셔터가 눌린다. 그리고 그것을 본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런 초현실적 사회가 무엇인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왜 만들어졌는가?
초현실이 점령한 사회는 작동을 설명하는 틀(house)를 통해 맹인상태의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준다. 하지만 이 눈은 완벽하지 않다. 그렇기에 때때로 오작동이 발생한다. 그 오작동에서 우리는 은폐된 초현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은폐된 초현실을 오작동의 상황에서 마주할 때 새로운 눈은 사라지고 맹인상태로 되돌아간다. 우리는 다시 사회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 총체적 난국의 상황에서 노순택은 사람들을 다시 맹인상태로 돌아가라고 역설한다. 새로운 감각을 찾아야만 한다고.
바슐라르는 그의 유명한 개념 '인식론적 단절'(obstacle épistémologique)을 통해 새로운 인식의 성과를 이룩해야 한다고 했다.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문제설정과 개념에 사로잡혀 사고하면 지식의 총체에 가까워질 수 없으며 새로운 지식의 총체를 위해 '인식론적 단절'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순택의 작업은 어쩌면 바슐라르의 개념 '인식론적 단절'을 이뤄내기 위한 하나의 처절한 싸움이다.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틀에 대한 고민이며 또한 이 총체적 틀(house)을 부숴내어 우리에게 새로운 감각을 주려고 한다. 그는 한국사회에 초현실이 점령한 이 상황을, 그리고 그 초현실적 상황을 평범한 상황으로 만들어 내는 정치공학들을 끄집어낸다. 발생되는 갈등과 미시적인 개인들 내에서 우리는 이 커다란 틀이 굉장히 기괴하게 보인다. 그리고 다시 질문이 생긴다. 이러한 체계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곳에서 살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을 수용자들에게 던지면서 새로운 총체적 지식의 접근 방향을 찾아야한다고 역설하는 것이 노순택의 전략이다.
2) 다큐멘터리적 특성
노순택이 현장에서 찍은 사진들은 그 현장의 삶을 증언 할 뿐만 아니라 그의 활동 속의 사색이 닮긴 물리적 증거이다. 그는 저널리즘 사진이 결국 사건의 총체적 지식을 알 수 없었기에 저널리즘에 만족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저널리즘은 항상 사건의 마침표에 있다. 사건의 전개과정을 포착하는 것이 아닌 그 순간 순간을 담는다. 저널리즘의 사전적 용어에 대한 해석이나 신시대의 저널리즘 개념을 들이민다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저널리즘이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언론사의 저널리즘'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순택의 사진은 가히 다큐멘트적이라 볼 수 있다. 아니 기존의 다큐멘트를 뛰어넘었다고 볼 수 있다. 다큐멘트는 [가르친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도세레Docere]에서 유래됐다. 으젠느 앗제에 의해 처음 사용됐으며 다큐멘터리 사진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 이상의 것을 의미하며, 사회양상의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보는 사람들을 교화시킨다는 의미를 가진다.
노순택의 사진은 사회양상을 드러냄과 동시에 체계의 오작동을 보여줌으로써 초현실적 상황의 포착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시야를 주고자 한다. 단순한 정보를 전달하는데 그치지 않고 초현실적 상황에 대한 인류의 포착과 더불어 의제를 던짐으로써 '인식론적 단절'을 도모해 체계의 총체적 지식의 새로운 앎에 대해 고민하게끔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노순택의 사진은 관습적인 방법으로 분류하기 힘들어 보인다. 이 사진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순수 사진'의 계보에 속하지도 않고, 다큐멘터리 사진의 분류에 완벽하게 속하지도 않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일반적인 의미의 다큐멘터리 사진이었다면 우리 사회에서 희생된 이들을 국가와 사회가 과연 어떻게 대접하고 있는가, 그들이 겪은 슬픔은 무엇인가? 무엇가 고발했을 것이다. 일반적 의미의 다큐멘터리 사진이 던지는 질문은 매우 정치적으로 보이지만 작동하는 방식은 오히려 탈정치적이다. 질문들의 답이 미리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3. 사진의 정치와 생각 ([잃어버린 보온병을 찾아서], [좋은 살인], [망각기계])
1) 거울편지
노순택의 다큐멘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 지점을 주목해야만 한다. 노순택이 보여주는 현장의 긴급함이 하나이며, 찍는 시간과 배치하는 시간 사이의 차이가 다른 하나이다. 그의 사진 작업은 '다시 읽어내는' 작업을 통해 완성된다. 현장의 긴급함과 이 긴급한 상황의 초현실을 읽어내는 그의 감각이 다시 읽어내는 작업을 통해 완성된다. 이는 수용자가 이 초현실을 비판할 수 있는 다리를 만들어준다. 그의 작업 [잃어버린 보온병을 찾아서]에서 이러한 그의 작업적 특성은 극대화된다. 2010년 11월 연평도에서 북한의 포격도발 사건이 발생된다. 이때 병역 기피 의혹으로 국민들로부터 좋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던 당시 한나랑당 대표 안상수가 연평도를 방문한다. 그곳에서 그는 보온병을 들고 기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포탄이라고 말했다. 옆에서 육군 중장 출신 황진하 의원도 작은 통은 76.1mm같고, 큰 것은 122mm 방사포탄으로 보인다고 거들었던 해프닝이 벌어진다. 하지만 노순택은 이를 단순한 헤프닝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작동하는 동시에 오작동하는' 분단정치의 상징적 사건으로 규정한다. 그렇게 노순택은 연평도를 다시 가게 된다.(이 헤프닝이 벌어지기 전에도 노순택은 연평도 포격도발 사건 당시 촬영을 위해 연평도에 방문했다) 그는 안상수가 나를 연평도로 보낸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분단정치의 작동법을 보여주던 몸짓과 보온병을 포탄으로 승화시킨 그의 고상한 상상력을 칭찬하며 '보온병 찾기'활동을 시작한다. 그렇게 3년간의 보온병 찾기 프로젝트가 시작되는데 사실 본질은 보온병 찾기가 아니다. 단순한 안상수 비판과 정치행각의 비판 역시 아니다. 이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조적인 어투와 '우리식 사회주의', '우리식 민주주의'라는 기원을 찾아가는 형태로 진행된다. 동시에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체계가 오작동할 수 있는지, 분단정치란 도대체 무엇인지를 고민하면서 사유한다. 마지막엔 "보온병은 안상수가 내게 보낸 편지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보낸 편지였다. 분단인이 분단인에게 보낸 거울편지였다." 라며 자조적 목소리를 내비친다.
위의 작업을 통해 볼 수 있듯이 노순택은 체계가 만들어낸 독특한 이데올로기적 수사가 어떻게 초현실을 감추는지, 초현실을 설명 가능하게 만들었는지 보여준다. 동시에 이데올로기적 수사의 은폐된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우리는 지금껏 어떤 세상에 살아왔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하자고 말하고 있다. 그의 자조적인 목소리안에 세상을 바꿔보자는 혁명적인 수사 역시 나타내고 있다.
2) 망각을 생산하는 기억의 기계들
<애국의 길 Paths of Patriots> Archival Pigment Print, 2003
그의 작업 [망각 기계]에서도 같은 작업적 특성이 나타난다. [망각 기계]에서의 노순택의 사진 <애국의 길>은 마치 백 년 전 카프카의 문장과 닮아있다. 카프카처럼 차갑고 건조하게 묘사한다. 이곳의 세상은 초현실적이고 어딘가 뒤틀려 있다. 어느 누구도 등장인물이 처한 고통스러운 상황의 이유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등장인물은 국가가 만들어낸 과거의 이데올로기적 수사에 갇혀 존재한다. 그는 이 이데올로기의 이면을 바라보지 못한다. 탈출하는 법도 모른다. 그가 세상을 떠나도, 세상은 그를 만들어낼 것이다. 과거의 이데올로기에서 현재의 이데올로기로 혹은 국가 정체성으로 무장한 무언가는 또 다른 그들을 생성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풍화되고 누구의 공감도 얻지 못한 채, 사진에 갇혀 조금씩 망각될 것이다.
사진 속 노인의 모습을 보면 그가 국가를 위해서 얼마나 처절하게 노력했는가 일했는가를 모두가 알아주길 원하는 것 같다. 아마도 자신의 희생이 대한민국과 우리가 살아갈 수 있었음을 깨닫도록 우리가 기억하고 애도하길 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우리가 과거를 영광스럽게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도저히 재현될 수 없는 역사의 순간들이 있듯이 말이다. 과거 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졌던 사건은 도저히 대한민국의 선진화를 위한 위대한 여정이라고 볼 수 없다. 무엇도 이 사건을 속 시원히 설명할 수 없다. 선진국이 되기 위해 사람을 죽일 이유도 없으며, 사람을 죽인다고 선진국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아트인컬쳐 발췌)
그렇다면 5월에 일어난 그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민주화를 위한 항쟁? 아니면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동을 일으키려는 공작원들에 일어난 우발적 사건? 혹은 국가의 일방적 학살인가? 아니면 불미스러운 사고인가? 여기서 그 무엇도 어느 한 사건으로 규정되는 순간 누군가는 스스로 믿고 있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역사가 부정당하고 모욕당할 것이다. 이런 지점에서 기억의 투쟁이 생겨난다. 그리고 도태된 기억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이들은 망각될 것이며 동시에 늙어갈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망각된 기억을 다시 보여주고자 할 때 일종의 초현실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특수한 시공간 안에서 보여질 것이다.
[망각 기계]의 사진들은 시대착오적이다. 이미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광주에 대한 기억을 민주화 투쟁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518 기념재단 홈페이지의 표현으로 그들의 죽음은 "조국의 민주, 자주, 통일을 위한", "이 땅의 역사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위한 사건으로 규정된다. 하지만 이제 와서 노순택이 이 이야기를 가져왔던 이유는 무엇일까? [망각기계]의 사진들은 괴이하며 음산하다. 무덤에서 눈물을 흘리는 유가족과 그들을 사진으로 만들어내는 이들. 구경꾼들, 정치인들 모든 것들이 어딘가 뒤틀려 있다. [잃어버린 보온병을 찾아서]에서 안상수가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변호한 검사라면서 민주검사를 외치며 상이한 정치적 행보를 이어갈 때, 광주를 찾아 많은 광주 시민들의 욕을 먹는 모습 역시 이 기억들이 뭔가 공식적으로 규정됐다고 해서 제대로 된 기억인지 의문을 준다.
그간 광주가 재현되는 방식은 망각을 실현해내는 기계였다. 사진과 영화, 소설에서 잔혹한 계엄군과 인간미 넘치는 시민군의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우리가 보기 원하는 광주의 기억은 '과잉 재현'됐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은폐된다. 우리는 재현된 과잉 재현된 기억을 통해 눈물을 흘리고 공감한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가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밥을 먹고 일을 한다. 어쩌면 이런 공포적인 상황이나 사회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본인이 깊은 공감이나 열정을 가진 듯하게 만들어내는 듯하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로 광주의 학살이나 해부학적 참상에 깊숙하게 들어가는 것을 거부한다. 대신 '적당히 참아낼 수 있는 정도'의 기억을 선택한다. 공식적으로 규정된 기억 '광주에서 죽은 영령들의 희생을 통해 지금의 민주주의가 가능했다'식으로 과거의 기억은 봉합된다. 그렇게 규정된 광주를 통해 우리는 일상으로 도피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사진은 기억의 도구들이 망각을 불러 일으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답답하고 괴이하다. 그러나 빠져나갈 방법을 모른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여순사건이나 제주 4.3사건 같은 제노사이드는 공식적 기억마저 최근까지 거부됐다. 이승만의 빨갱이의 규정과 탄생은 국가 이데올로기와 북한과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에 너무나도 중요한 수사가 됐다. 72년이나 지난 상황에서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무죄 판정이 확정됐고 2021년 6월 16일에 여순사건 특별법이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필자가 19년 9월에 공군 훈련소를 갔을 때 여순사건 진압에 참가한 정찰기가 교육시간에 나왔다. 교육시간에 공군의 정찰기의 노고를 칭송하며 그때 반란군을 진압한 우리의 군이 지금의 민주주의와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같은 사건에 대한 기억이 상이한 것이 기괴함을 그리고 그곳에서 반박과 여순사건은 사실 학살이었다고 말할 수 없는 목소리를 거세당한 나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여순사건이, 제주 4.3사건이 공식적으로 학살로 규정된다 하더라도 이런 상이한 기억은 72년간 지속됐다. 그리고 끊임없이 재생산됐을 것이다. 군대에서 훈련소에서 그들은 반란군을 때려잡았던 과거의 영광에 도치돼 우리가 이런 위대한 역사를 가진 부대에서 활동했다고 할 것이다. 그들의 기억은 머지않아 폐기된 것이 될 것이며 또 다른 애국의 길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리고 다시 공식적 기억을 수호하려는 세력과 싸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진실을 어디로 갈까? 무엇이 망각이고 무엇이 기억인가? 우리는 이 질문을 계속해서 가져야 할 것이다.
3) 좋은 살인
문제는 그들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을 사고'할 만큼 충분히 냉정하다는 것이 아니라, 사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_한나 아렌트
스물두 살의 공군 사관학교 생도. 하늘을 맘껏 날며 빨간 마후라의 낭만을 품고 있던 한 인생이 있었다. 4년의 시간을 사관학교에서 보냈다. 문제는 그가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앞을 내다보려 했다는 것이다. 그는 짧은 일기를 블로그에 개시한다.
"F15K, 넌 참 좋은 기계인데 요즘은 살인기계로 보여. 나는 심란해. 내가 이 기계를 몰게 될 수 있을 텐데, 실수로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겠구나."
좋은 기계에 관한 사유는 이것이 살인 기계가 될 수 있겠다는 사유로 변질된다. 어떻게 보면 상식적인 고민이다. 마이클 샌델 역시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끊임없는 딜레마 상황에 대해 언급한다. 아프가니스탄에 간 전투원이 탈레반일지도 모르는 포로를 잡았다. 그는 평범한 염소몰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탈레반이라면 우리의 비밀 공작이 밝혀지고 모두가 죽게 된다. 이 포로를 죽일 것인가 놓아줘야 할 것인가? 죽인다면 전투원 모두가 살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염소몰이일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죽였기에 모두는 살인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놓아준다면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이러한 상식적 딜레마는 어찌 보면 그의 짧은 일기와도 겹쳐 보인다. F15K가 폭격한 그곳엔 정말 '적'만이 존재할까? 민간인이 있을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하지만 비상국가는 이런 딜레마에 대한 사유를 거부한다. 보수언론은 이런 공사생도의 사유를 보며 충격을 금치 못한다. 중앙일보가 앞장서고, 조선일보가 맞장구를 쳤다. 그들의 사설에 따르면, 사관 생도는 "반군(反軍), 친공(親共) 사상을 가진 자. 대당 1000억원의 F-15K를 갖고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는 자, 좌파 전교조 교육에 물든 자" 였다. 심지어 본인도 모르게 "공산당 선언을 버젓이 블로그에 올리는 자"가 됐다. 그렇게 그는 공군 사관학교에서 퇴학당한다.
노순택은 금기를 다시 확인한다. 좋은 살인 기계는 무엇인가? 좋은 총은, 그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더라도 살인을 전제로 태어난다. 좋은 총은, 사람을 잘 죽이는 총이다. 좋은 폭격기는,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더라도 대량살상을 전제로 태어난다. 좋은 폭격기는, 사람들을 잘 죽이는 폭격기다. 하지만 세상은 목적만을 말한다. 수단에 전제된 '목적'은 숨긴 채. 빨갱이를 죽이기 위한, 우리를 방어하기 위한, 우리는 좋은 살인만을 전제하고 행동한다고 자랑스럽게 혹은 자신 있게 말한다. 그 누구도 불안함이나 의심을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찬양의 대상이 된다. 에어쇼, 헬기레펼쇼, 탱크쇼, 기관총쇼 등 많은 살인의 기계는 찬양과 축제로 변한다.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끝없는 사유의 끝에 전개했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은 현대에 재생산된다. 한나 아렌트의 입을 다시 빌린다. "모두가 유죄인 곳에서는, 아무도 유죄가 아니다. 말하자면 집단적인 유죄의 고백은 범죄자를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실행 가능한 탁월한 방어수단이며, 그 범죄의 규모는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데 대한 가장 탁월한 변명이다"
노순택의 [좋은 살인] 작업은 나에게 내장된 여러 기억들을 다시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아시아 최대 규모의 전략을 가진 요충지 11전투비행단 공보정훈실에 근무했던 나는 F-15K의 위대함을 알리기 위해 2년간 일을 했었다. 과거 아렌트를 동경했던 '악의 평범성'에 극히 공감했던 나는 과연 군대에서 사유를 잃은 것이 아닌가? 끊임없이 고통스럽긴 했다. 하지만 사고는 사고를 부른다. 나는 의심이 거세 당한 채 좋은 살인을 옹호하며 좋은 살인의 전략적 위대함을 널리 퍼트리는 일에 동조했다. 또한 의심하지 않았다. 어쩌면 의심했었다. 그러나 의심은 사라졌다. 놀랍게도 전역을 한 이 시점 제 3의 눈으로 봤을 때 정말 냉정하게 이런 사고는 다시 발생된다. 위험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4. 결론 - 결국 노순택의 사진은 어떤 세상을 보여주는가?
노순택의 세상을 보는 독특한 시각은 우리에게 항상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여러가지 이념들이 난무하고 각각의 이익이 상충되는 현실세계에 국가가 만들어내는 괴이한 상황을 포착한다. 이런 상황들은 너무나도 괴이하고 이상하기에 현실보단 판타지 같다. 초현실을 보여줌으로써 그 안에 감춰진 체계의 오작동을 보여준다. 그리고 체계 역시 보여준다. 체계에서 발생되는 오작동 그리고 그 오작동의 시공간에서 우리는 질문을 받는다. 이 세상은 무엇인가? 세상을 어떻게 만들었는가? 왜 이 세상은 이렇게 생겼는가?
그의 작업들은 분단 상황에서 비롯된 모든 갈등과 비극, 희생이 특수한 이유에서 사유를 용인하지 않는 폭력을 묵인하는 제도와 얽혀 있음을 말한다. 그의 입장에서 제도화된 폭력은 한국사회의 근현대사 형성 과정 속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다. 작가가 형상화한 사건들은 부도덕한 개인이나 우발적인 상황이 야기한 것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 생겨날 수 있는 구조적인 문제이다. [잃어버린 보온병을 찾아서]에서 작가가 보여준 것은 분단구조의 오작동과 분단체계의 작동방식이다. [망각 기계]에서 보여준 것은 분단구조의 오작동을 망각하게 만드는 기계들 진실을 은폐하고 진실을 알고 있다고 말하게 만드는 기계들의 존재이다. 마지막으로 [좋은 살인]에서 노순택은 이 모든 상황의 이면에 사유를 억제하는 구조, 사고가 '사고'로 이어지게 만드는 구조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제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세상은 무엇인가. 세상은 어떻게 생겼는가? 왜 세상이 이렇게 생겼는가? 노순택은 결국 이 핵심 의제들을 끌어 올리기 위해. 우리가 핵심 아젠다에 도달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가 끊임없이 고민했던 이 3가지 질문. 그 질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개인이 풀 수 없다. 노순택은 핵심 의제들을 우리에게 도달하게 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답하고 동시에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 어떤 식으로?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고민해야한다. 우리는 사고를 통해 진정한 '사고'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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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택. [잃어버린 보온병을 찾아서]. 오마이북,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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