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자 종합 선물 세트가 주었던 설렘
불을 끄고 자리에 누운 지 한참이 지나도록 나는 눈을 감고 기다렸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걸 확인하고서 머리맡에 두었던 과자 선물 상자를 들고 살금살금 거실로 나왔다. 베란다를 통해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으로 더듬더듬 네모나고 커다란 상자를 열었다. 손에 집히는 작은 것을 꺼내 소리가 나지 않게 포장지를 뜯어 과자를 단숨에 먹었다. 다음 날은 어린이 날이었다. 늦은 밤 퇴근한 엄마가 내 머리맡에 둔 무언가는 과자 종합 선물 세트였다.
과자가 담긴 위풍당당한 상자를 실눈으로 확인하고는 얼른 먹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다. 다음날 아침에 깜짝 놀랄 나의 반응을 엄마가 기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한참을 싸웠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다시 잠이 들기를 바랐지만 도리어 상자 속 과자들을 헤아리느라 잠은 저 멀리 달아나버렸다. 그리고 잠을 가장한 기다림 후에 꿀꺽 삼킨 달콤함. 분명 딱 하나만 마음먹었는데 작은 과자 하나를 더 집어 먹었다. 과자를 우물거리며 선물 상자 안으로 팔을 쑥 집어넣었다. 무엇이 더 남았고 어떤 것들이 더 있는가 하는 기대감에 상자는 한 없이 깊어 보이기만 했던 어린 날의 기억이다. 나는 먹었던 과자 봉지를 잠옷 주머니에 구겨 넣고 선물 상자를 다시 머리맡에 두었다. 그러고 나서야 기분 좋게 잠이 들었는데, 내일 아침이 되면 상자안의 과자들을 모조리 꺼내 살펴볼 즐거움에 들떠 있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 난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선물 상자 앞에서 또 다시 좋아했다. 지금 생각하면 투박하고 각진 종이 상자에 불과했는데 그땐 어쩜 그리도 대단해보였는지.
상자 안에 어떤 과자가 들어있는지 매번 받고도 설레며 헤아리던 시절. 밤이 늦도록 입에 남은 달콤함에 기분 좋게 잠들던 어린 날. 꿈꾸던 많은 것들이 오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여길 만큼 압도적인 희망으로 가득했던 때. 지금의 어른들도 공평하게 누렸을 찬란한 그 시절은 살아온 시간에 비례하며 불가능의 시대로만 진입하려고 한다. 세차게 불던 바람 소리 대신 밖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를 들으며 지금의 어른들에게도 주어졌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 이라는 지나간 프로그램에 김영만 아저씨가 출연했더랬다. <뽀뽀뽀>에서 종이접기를 알려주던 김영만 아저씨는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든 모습이었다. 아저씨 따라 삐뚤빼뚤 종이접기 하던 어린이들도 어른이 된 긴 시간만의 조우였다. 김병만 아저씨는 종이접기를 하다가 카메라를 향해 이런 이야기를 던졌다. “어린이 여러분, 이제 어른이 됐죠? 종이접기도 이제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이 말에 당시 많은 시청자들이 눈물을 훔쳤었다. 나도 그렇다. 어린이에서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미숙해서 위로받고 싶은 우리를 다독여주던 한 마디의 힘은 컸다.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간극이 있기 마련이다. 간극의 차이만큼 좌절하고 외로워하는 어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결국 사회를 냉소적으로만 바라보는 그저 그런 어른이 된 건 아닌지 반성도 해본다.
저녁에 들른 마트에는 어린이날을 맞아 여러 가지 장난감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을 추억하게 하는 과자 선물 세트도 보였다. 예전과 달리 크기가 작아지고, 패키지는 세련됐다. 옛날 생각을 갖고 산 과자 선물 세트는 생각보다 조촐했다. 질소가 가득한 과자 봉지는 매번 열 때 마다 사람을 시무룩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가득 찬 것 같은 봉지 안의 실상은 적은 양의 과자인 것처럼 어쩌다 어른이 된 이들의 허전한 마음을 채워줄 어떤 온기가 필요한 요즘이다.
어느덧 꿈꾸던 날들은 지나가고 현실에 발붙이고 사는 나이가 되어간다. 어른이 된 모두는 사회에서 주어진 역할을 해내며 고군분투한다. 삶의 이면에는 치유해야 할 부분이 많지만 스스로 점검하기엔 사는 일이 바빠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잠시 여유있게 내게 주어졌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어떨까. 잠시 놓고 살아야했던 꿈을 다시 꺼내들게 만드는 에너지와 곤란한 지금의 처지를 이겨내게 하는 희망이 그곳에 있을지도 모를 테니 말이다. 어린 시절 그 어딘가에.
나는 저녁에 사온 과자 선물 세트의 내용을 모두 꺼내놓고 괜스레 마음의 위로를 받았다. 위로 받고 싶은 지점이 어린 시절에 있었던가 떠올리며 달콤한 과자를 먹었다. 어른이 된 우리가 위로 받고 싶은 상처는 어디쯤에 있을까. 내가 먼저 위로를 건네야 할 누군가는 어디에 있는지 잠깐 생각해볼 필요를 느낀다. 우리는 투박하고 네모난 박스를 두고 이제는 무엇을 떠올리려나. 창밖으로 뛰어노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