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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사람 Jun 11. 2017

계절의 온도를 따라 먹는 음식

겨울엔 냉면




 음식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이 있다. 부푸는 추억에 상상력까지 더해지면 음식을 먹었던 그 순간까지 소상히 떠오른다. 여러모로 맛을 떠올리는 건 그날의 분위기를 다시금 추억하는 일이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떠오른 건, 냉면을 먹었던 겨울의 어느 날이다.  





 동장군의 기세가 등등한 겨울날이었다. 몸을 잔뜩 움츠리고 길을 걷는데, 배가 고파져 무엇을 먹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냉면집이었다. 자주 가 본 적이 없던 동네라 길을 자칫 헤맬까 싶어, 그냥 들어갔다. 따뜻한 만둣국이라도 먹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간 냉면집은 추운 날씨에도 테이블이 꽤 차 있었다. 테이블마다 올려진 음식은 냉면이었다. 


 바깥바람에 차가워진 손을 비비며 찬기를 털어낼 때쯤 냉면이 나왔다. 매콤하고 새콤한 비빔장 아래에 깔린 자작한 냉면 육수. 동그란 모양을 틀고 가지런히 놓인 면발을 십자 모양으로 가위질하고 쓱쓱 비벼내자 고소한 향이 피어올랐다. 맛깔스러운 빨간 빛깔에 한 번, 침샘을 자극하는 양념장 향에 또 한 번, 침을 꼴깍 넘어가게 하는 비주얼이었다. 냉면의 이름은 ‘섞이 냉면’이었는데, 비빔냉면과 물냉면의 장점을 섞은 것이었다. 젓가락으로 면을 몇 번 휘이, 감아서 입안으로 쏙 넣었다. 냉면은 방금까지 얼굴을 때리던 매서운 바람과 흡사했다. 냉면의 면발은 쫄깃하고, 양념에선 고소한 맛이 돌았다. 비빔냉면이라기엔 육수가 제법 자박하고, 물냉면이라기엔 양념이 담뿍 담겨 있다. 물냉면과 비빔냉면 그 중간사이에 있는 냉면은 조화로운 맛으로 섞여 있었다. 그리고 냉면의 화룡정점은 주전자에 담아져 나온 따뜻한 육수. 뽀얗게 우려진 깊은 맛의 육수를 한 모금 마시자 얼었던 몸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육수는 뼈를 우린 국물이다. 뼈 이면의 맛인 셈이다. 뼈가 가진 이면의 맛을 들춰내기 위해선 오랜 시간을 고와야 한다. 투명한 물이 뽀얗게 일어 오를 때까지. 시간에 비례하며 맛은 달라진다. 깊은 맛은 그 의미를 따를 때 나타난다. 깊은 맛은 감칠맛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감칠맛을 느낄 줄 안다는 건, 삶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지는지 느낄 줄 아는 것이다. 라면 한 그릇, 김밥 한 줄을 먹어도 그 맛으로부터 힘을 얻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이어지는 시간을 사는, 그런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있다. 어떤 음식에서든 감칠맛을 뽑아내는 이들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끈질김을 가진 이들이다. 그래서 감칠맛을 안다면 어른스러운 사람이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모든 음식을 맛있고 감사하게 먹는 이들을 보면 삶을 다부지게 살아가는 뚝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냉면이 기록된 최초의 문헌은 《동국세시기》다. 조선 후기, 홍석모가 연중행사와 풍속들을 정리하고 설명한 세시풍속집으로, 동국세시기의 목차 중, ‘시절음식’에 냉면이 소개되어 있다. 동국세시기 속, 냉면의 소개를 보면 메밀국수를 무김치와 배추김치에 말고 돼지고기를 섞은 것이라고 나온다. 음력 11월 동짓날에 먹는 음식이라고 하니, 냉면은 겨울에 제격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냉면은 세 번 떨면서 먹게 된다고도 하지 않는가. 먹으러 가면서 떨고, 먹으면서 떨고, 돌아가면서 떤다고 한다. 겨울이 되어 먹는 냉면은 여름에 먹는 것과 또 다른 별미인 셈이다.


 냉면은 금세 바닥을 보였다. 배고픔이 사라지자 느긋한 마음이 생겨났다. 목도리를 동여매고 따뜻한 육수를 한 모금 마셨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추운 겨울이 얼른 지나갔으면’했었다. 그 마음이 멋쩍게 어느새 날씨는 여름의 초입에 들어섰다. 생각해보면 더운 날엔 뜨거운 삼계탕을 먹으면 기운을 보충한다. 그리고 겨울엔 냉면을 먹으며 별미라 한다. 계절의 온도를 거스르지 않는 음식을 먹는 건, 계절의 성실한 변화에 순응하는 일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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