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별미
기존에 살던 도시와 동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하면서 동생과 나는 전학을 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고, 동생은 3학년이었다. 학교와 집까지는 다소 거리가 있어서 수업이 끝날 때쯤 엄마가 낡은 차를 끌고 우리를 데리러 오곤 했다. 아직은 집과 학교 사이를 오가기엔 지리가 낯설었던 어느 날, 매 시간 맞춰 오던 엄마가 늦었다.
우리는 가방을 둘러메고 신발주머니를 휘휘 저으면서 운동장을 설렁설렁 걷다가 의미 없이 뛰어 잡기를 하며 깔깔 웃어대기도 했다. 철봉에도 매달리고 미끄럼틀을 타면서 신나게 노는데 돌연, 내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는 상황이 닥쳤다. 동생이 운동장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배가 고프다고 얼른 집에 가자는 것 아닌가.
이걸 어쩌나 싶은 마음에 나는 제법 어른스러운 행동을 흉내 내고 싶어졌었다. 그래서 우는 동생 손을 붙들고 학교 복도 안으로 들어가 공중전화 부스 앞에 섰다. 그땐 학교 안에 공중전화가 한 대 있었다. 쉬는 시간이나 수업이 끝나는 시점에 아이들이 왕왕 줄을 서서 어딘가 전화를 하거나 삐삐를 쳤었다. 나는 엄마 삐삐 번호를 누르고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까지 동생이랑 걸어 나가 있겠다며 음성 사서함을 남겼다. 그리고 곧 가방 앞주머니에 넣어둔 삐삐가 울렸다. 엄마는 예상보다 일이 늦어져서 이제야 출발한다고 했다. 심심하면 정류장까지 슬슬 걸어 나와 있으라고 했다. 학교에서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까지는 우리 걸음으로 15분에서 20분 정도가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동생에게 버스 정류장에 가서 무언가를 먹으며 기다리자고 했다.
초등학교 정문 앞에는 재미있는 매점이 있었다. 일반 가정집만한 규모의 아주 작은 곳이었는데 오밀조밀 우리들이 좋아할만한 불량식품들 천지였다. 이 매점에서 팔던 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앵두였다. 매점 뒤에는 커다란 앵두나무가 있었는데 주인 할아버지께서 앵두 철이 되면 앵두가 터지지 않게 살금살금 따다 바구니에 놓고 파셨다. 오백 원을 드리면 종이컵에 한 가득 담아 주셨다. 나는 걸어가는 중에 동생이 배고플 것 같아서 앵두 한 컵을 샀다. 동생은 앵두를 한 알 한 알 입에 넣으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배가 고팠던 게 아니라 운동장에서 놀던 게 지루해진 탓에 투정을 부렸던 것 같았다.
시골이라 흙길이었고 길 양 옆으론 논밭과 소를 키우는 곳들이 곳곳에 있었다. 익숙하게 걸어 다니게 되고부터는 등하굣길을 무척 좋아했었다. 한 컵에 담긴 앵두는 동생과 내가 걸어가는 길이 절반도 되지 않아 몽땅 먹어치웠다. 손끝이 벌개져서는 옷에 아무렇게 쓱쓱 닦아내며 걸었다. 전학 온 지 채 일주일도 안 된 낯선 동네에서 동생을 데리고 걷는다는 게 순간 묘했다. 어른이 된 것 같았고, 이렇게 씩씩해지는 건가 싶어 보람찼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그 시절 이 날의 이야기가 또렷이 기억에 남는 건 참 희한한 일이다. 그만큼 어린 마음에 모험처럼 느껴졌던 어느 날로 인식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한참이 흘러서도 이 날이 기억에 남는 건 칼국수 때문이다.
흙길을 걸어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 동생은 이제 정말 배가 고프다고 나에게 무언가를 먹자고 했다. 버스 정류장 바로 앞에는 단출한 음식점이 하나 있었는데 문 앞에 파란색 글씨로 칼국수라고 크게 써져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거나 곧 버스에 올라 탈 출출한 누군가가 들어설 식당 같았다. 나는 옆으로 미는 문을 드르륵 열고 동생과 들어갔다. 조그마한 여자 아이 두 명이 들어와 자리에 앉았지만 주인 아주머니께서는 의아하게 쳐다보지 않으셨다. 나는 칼국수 하나만 달라고 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삐삐를 쳐야 하는데 전화 한 통만 써도 되는지 여쭈었다. 아주머니의 동의를 얻어 엄마에게 정류장 앞 칼국수 집에 있다고, 사서함을 남겼다. 칼국수라고 크게 써져 있는 집이라고 강조했었다.
의자에 앉자 키가 작았던 동생과 나는 공중에 둥둥 뜬 다리를 앞뒤로 저으며 칼국수를 기다렸다. 주방 쪽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아주머니의 파마머리가 안개 낀 바다에 뜬 섬처럼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가득 담긴 칼국수 한 그릇이 나왔다. 도저히 하나라고는 믿기지 않을 양이었고, 건장한 어른 한 명이 먹기에도 제법 많은 양은 아니었을까 싶은 기억이 날 정도의 양이었다. 아주머니는 움푹 파인 접시 두 개를 가져와 사이좋게 나눠 먹으라며 손수 칼국수를 덜어주셨다. 어린 아이 둘이 와서 칼국수 한 그릇 시킨 게 웃기기도 하고 귀여워하시는 눈치였다. 칼국수는 정말이지 뽀얀 국물에 채 썬 애호박이 듬뿍 담겨있었다. 그릇에서 무럭무럭 피어나는 밀가루 향도 아직 기억한다.
칼국수를 동생이 맛있게 먹었다. 나도 열심히 먹었다. 그런데 양이 줄지 않아 난처했다. 어린 아이도 자신을 예뻐하는 사람을 가리기 마련이다. 아주머니가 가득 담아 주신 애정에 마음이 쓰여서 나는 이 많은 걸 어쩌지 하며 호로록 면을 삼켰다. 얼마 안 지나 동생이 천진난만하게 “다 먹었다!”하는 것 아닌가. 손으로 배를 통통 치며 “언니, 나 배가 터질 것 같아.”했다. 그리고 이제는 엄마가 보고 싶다며 칭얼댔다. 어쩌면 운동장에서부터 어린 동생의 재주에 홀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이제 어른 노릇이고 뭐고 다 지쳤다. 그때 문이 드르륵 열리며, 파란색 칼국수 글자가 옆으로 힘차게 밀렸다. 동생이 의자에서 폴짝 뛰어 “엄마”하며 문으로 달렸다. 엄마가 칼국수 한 그릇 값을 계산하면서 우리는 칼국수 집을 빠져 나왔다.
이 날의 기억이 나만 특별했던 건 아니었나 보다. 어느 날 우연히 그 정류장을 지나는데, 동생이 마치 추억 보따리를 꺼내듯 “언니, 저기에 칼국수 집 있었던 거 알아? 저기 아주머니가 우리 한 그릇 듬뿍 주셔서 다 먹지도 못하고 나왔었어. 언니는 기억 안 날 수도 있겠다.” 라고 했던 것. 나는 동생에게 그날 네가 하도 배고프단 소리를 해서 나를 애 먹였단 이야기로 받아쳤다.
버스 정류장 곁에 자리 잡아서 어쩌면 매번 새로운 손님들을 맞아들였을 것 같았던 단출했던 칼국수 집. 가게에서 삶아내던 칼국수 길이만큼이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기억에 남는 한 그릇 추억으로 어린 시절 여행을 몇 번이나 오갔는지 모른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음식을 먹는다. 어린 아이도 처음 먹은 음식 앞에선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귀여운 표정을 연신 내보인다. 참 맛있어서 기억에 남는 음식도 있지만 인생의 어떤 단락을 기억하게 하는 추억 때문에 또렷한 음식도 있다. 이래서 추억이 별미란 말을 하는 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