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01 어쩔수는있다

박찬욱 [어쩔수가없다]의 감상

by 솔래 Solae
오죽했을 당신에게,
이제는 어쩔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 앞서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


영화 [어쩔수가없다]에서 처음 주목하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제목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제목이 극 안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일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자기 인식을 확장할 수 있는 언어 중 가장 강력한 언어는 ‘공감의 언어’로

이러한 언어만이 관객이 영화에서 마주하는 한계를

이해와 성장이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진화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 당신은 이 영화를 어떠한 언어로서 번역할 것인가?"





• 열다


처음으로 도망치고 싶어서가 아닌,

찾고 싶고 알고 싶어서 영화를 보러 갔다.


어릴 적 [플란다스의 개] 애니메이션을 보며

동화 속 유토피아를 동경하던 아이에게


영화가 주는 환상성은 최고의 도피처일지도 모른다.


나는 영화를 고를 때 선뜻 한국 영화를 먼저 고르는 편이 아니다.


익숙한 모국어의 소리, 한국인의 얼굴들은

현실과 너무 가깝게 느껴지게 만드는 탓이다.


여행을 가더라도 조금 더 먼 곳으로 떠나

낯선 곳에서의 해방감을 느끼고 싶은 것처럼,


평상시 영화에서 나오는 언어와 얼굴은

나와는 다른 세계처럼 느껴지길 바랐다.


하지만 오늘은 한국 영화를 선택했다.


드문 일이다.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


‘어쩔 수가 없다.’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은

우리의 합리화하고 싶은 마음, 손쉽게 수용하고 싶은 생각,

무력함 앞에 세워지는 체념의 심리 등을 숨기고 있다.


최후의 보루로 쓰게 되는 핑계일 수도,

수긍을 위한 가장 편리한 도구일 수도,

끝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애환일 수도.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말.


제목부터 숨겨지지 않는 비판의 내색이

이 영화를 더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대체 뭐가,


어쩔 수가 없는 걸까.




• 1 줄거리


영화의 큰 주제는 이러하다.


변해가는 시대와 비인간적 사회 시스템 속에 구조조정 등으로

대량 실업하게 된 전문직 기술자, 노동자들.


생존을 건 경쟁과 투쟁,

그리고 그 속에 타락해 버린 개인과 가정의 욕망 이야기.


제지 회사 관리자로 일하던 25년 경력의

주인공 만수는 회사가 인수되면서

한순간에 실업자가 되고 만다.


이후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전전하지만

무너진 가정을 세울 만한 직업은 갖지 못하고


압박감이 최고치에 다다를 시점,


본인의 전문 분야인 제지업의 일자리를

얻기 위해 경쟁자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그는 정보를 모으고 제거 인원을 추리기 위해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고 구인 공고를 올린다.


그렇게 살해 후보가 된 3명의 인물

범모, 시조, 선출은 차례대로 자신들이 경쟁 속에

있는지도 모른 채, 만수의 계획 아래 사라지고 만다.


3명의 인물을 살해하는 동안

만수는 우왕좌왕하며 극도로 긴장하던 첫 범행과 달리,

범행이 거듭될수록 능숙해지고 대범해 보이는 모습을 보인다.


재밌는 점은 이러한 살인에 대한 태도의 변화에서,


숨어 있던 생존에 관한 만수의 욕망과 그로 만들어진 살의가

점차 ‘악’에 가까워지며 수면 위로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이는 범행 대상에 대한 관찰과 범행 방법에서 드러나는데,


첫 살인 대상인 범모를 죽일 때 만수는 지속적으로 범모를

예의주시하며 그의 사생활을 관찰하게 된다.


그러던 중, 자신과 닮은 듯한 처지의 범모에게 공감을 하며


본인보다 직장과 가정에서 앞선 실패를 경험한 그의 삶을

자신 또한 겪게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또한 결과적으로는 범모가 아내인 아라에게 살해당하면서

만수의 첫 번째 경쟁자 제거 계획이 성공하게 되었으나,


사실상 그는 살인 미수로 그쳤을 뿐이며

시체 처리도 아라와 그의 내연남이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시조와 선출을 죽일 때는, 물론 같은 업종에 종사했던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어느 정도 투영과 공감을 하는 듯했지만,


처음보다 점점 더 망설이지 않고 살인하는 모습을 보인다.


시조를 죽인 후에 시체는 원래 토막을 낸 뒤 묻으려 했으나,


본인이 좋아하며 가꾸던 온실 속 식물들을 묶는 철사로

그를 묶어서 자기 집 앞마당에 나무 아래 묻어버렸고,


마지막 살해 대상인 선출의 살인은

그간 사용하던 6·25 참전용사 아버지의 총도 사용하지 않고,

단순 과음으로 인한 객사 사고로 위장해 버리기도 했다.


자신이 죽일 경쟁자들을 직접 마주하며 죽이는 걸 굉장히 힘들어했던 만수가, 마지막에 선출을 죽일 땐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태연하게 아내 미리와 영상통화까지 하는 장면은 정말 인상 깊었다.


그렇게 끝내 완전범죄로 범행을 마친 만수는 본인의 계획대로

제지 회사의 직원으로 재취직하고 그토록 다시 갖고 싶어 했던


‘다 가진 삶’을 돌려받지만,


경쟁자들을 죽이는 과정에서 아내 미리와

아들 시원의 의심과 불신,

그리고 딸 리원과의 단절 등,


전과는 다른 보이지 않는 갈등을 품게 되었다.


결국 그의 회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닌,


잠드는 사자의 발아래 놓인 듯 언제 흔들리고 깨질지 모르는

불안한 위장 행복임을 시사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 2 연출


처음 영화관 스크린에서 배급사가 나올 때부터

틀어져 나오던 배경음악의 클래식은


영화 속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로,

만수의 딸 리원의 첼로 소리로,

다시 배경음악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자연스레 초반 연결과 몰입을 잡아주었다.


이러한 영화적 장치의 물 흐르는 듯한 연결이

마치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재즈 음악과 같아,

새삼스레 감독의 세심함과 디테일에 감탄하게 되었다.


그리고 첫 시작 장면이 마치 예삿영화들의 해피엔딩처럼 보이는 것 또한

앞으로의 전개를 궁금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독특하고 흥미로웠다.


가장 인상 깊었던 연출은 빛의 활용인데,


만수가 실업 후 취직을 위해 면접을 하는 장면과

아라가 남편의 실종으로 진술하는 장면에서

인물들의 얼굴에 햇빛이 드리워지는 방법으로 활용된다.


면접장에서 눈부신 햇빛을 받은 만수는 예스맨이 되어

싫은 건 싫다 하고 싶은 본인의 속내를 숨기고 대답한다.


특히 면접장에 앉아 있던 인물 중


본인의 말을 전달하는 통역사의 얼굴이

빛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은,


다시 한번 ‘빛’에 의해 그의 진심이 왜곡되는 듯한

모습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편 아라는 남편에 관해 진술하던 중, 커튼이 젖혀져 얼굴에 햇빛이 드리우자,

자신이 남편을 살해하고 묻었음에도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양,

남편이 총기를 가지고 있었고 그 총기와 함께 사라졌다고 이야기한다.


‘빛’은 사물이나 인물을 훤히 비추는 역할을 한다.


나는 이 빛이 영화 속에서 인물들로 하여금 자신의 속내나 비밀을 감추기 위해 더 과장되고,

더 적극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인간의 저질스러운 욕망을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또 한 가지 인상 깊었던 것은 블루칼라인 만수가

다시 취직하고 첫 출근, AI 뿐인 공장에서

파란색 이어 플러그를 꽂으며 일하는 장면인데,


이 장면은 초반에 공장에서 일할 때 동료들과 함께 있던 장면과

대비를 이루며 삭막해진 노동자들의 일터와,

경쟁에서 살아남았음에도 홀로 남은 만수의 노동자로서 위태로운 위치를 보여주는 듯했다.


영화의 마지막 엔딩에서 사용된 순수한 폭력적 행위인 ‘벌목’ 장면은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역할을 하며 박찬욱 감독의 폭력에 대한 관점을 보여준다.


감독의 인터뷰 중에서 “박찬욱 감독은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묘사를 좋아한다.”라는 견해에 대해

그는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때 피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https://youtu.be/5s7st9scmlo?si=tHZPjl4YeQizKzG9


이러한 답변을 빌려 엔딩을 다시 보자면 묘사를 넘어 폭력 그 자체를 영화의 마무리로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은

사회의 부조리함이라는 폭력은 ‘어쩔 수 없다’라는 말로 외면할 수 없다는,

폭력적 세계관에 대한 감독의 강력한 외침인 듯하다.




• 3 해석


나는 영화가 끝나자마자


이 영화는 신기술의 도입 등 시대 흐름에 따라 노동자들이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경제 시스템과,

그 속에서 만들어진 추악한 인간의 욕구와 생존 본능을 보여주고,

타락해 버린 사회를 어쩔 수가 없다며 치부하는 사람들을 향해


‘정말 어쩔 수가 없었는가. 물으며 꼬집는 영화구나…’라고 정리했다.


또한 부조리한 사회구조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영화를 보는 내내

마치 [기생충]을 떠올리게 했다. (연출 등에 있어서도)


개인적으로 이러한 경제 시스템이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전락시킨다는 점에서

‘비인간적’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는 지극히 당연한 수요와 공급 원칙을 따르는 자본주의 시장의 순리이면서,

동시에 실업으로 인해 생기는 ‘효율의 모순’을 보여주는 현대 사회의 사실적인 모습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모순은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늘 진보적인 방향으로 작동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여러 번의 정-반-합을 순환적으로 반복하며 도달된다고 할 수 있다.


사회는 새로운 ‘정’으로 향할 때 세계에서는 혁신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기존과 다른 ‘정’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차선’이었던 ‘합’이 ‘차악’으로 변하는 지점이 필요한데, 기존 체계가 ‘차악’으로 기능할 때 ‘효율이 폭력이 되는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 혁신의 ‘정’으로서 등장한 초기 자본주의 시스템은 ‘반’과 ‘합’을 거쳐 현대 자본주의를 만들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이런 현대 자본주의가 ‘차악’으로 기능하며 그 뒤에 가려진 폭력성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당연시하던 현재 사회의 시스템이 정말 ‘어쩔 수가 없는가?’에 대해 고민해 보게 만든다.


주인공 만수는 ‘합’의 세상은 모순 그 자체를 상징하며 부조리해진 기존 시스템 유지에 일조하는 인물로서 등장한다고 할 수 있으며, 관객이 만수에게 몰입하게 되는 과정은 개인의 탐욕과 욕망에 대한 ‘거울’로서 작용하여 이러한 비판 의식을 더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합’에서 새로운 ‘정’으로 나아가기 위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 [어쩔 수가 없다]는

그 자체로 물음표가 생략된 의문문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닫다


마지막으로 가장 많이 곱씹은 것은 계속해서 언급한

이 영화의 제목인 [어쩔 수가 없다]로,


근래 문득 든 생각이 떠오르게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말은 무엇일까?’


나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말은

‘오죽’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오죽했을까, 오죽하면 그랬을까…’


사람은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한 것,


즉 ‘내면 세계와 상호작용이 이루어지지 않은’

외부 세계의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배제된다.


(이때 ‘경험’은 매개를 통해 작동하는 간접경험 또한 포함한다.

*내면 세계 - 매개 - 외부 세계)


우리는 겪어보지 못했기에 타인에게 무섭도록 잔인해지거나,

혹은 지나칠 정도로 남의 일에 무관심해질 수도 있다.


그렇기에 나에게 ‘오죽’이라는 말은,


우리가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더라도

최대치로 상대를 이해하고 공감하고자 하는,


배려의 정점에 서 있는 말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특히 자신의 경험을 낮추어서 상대의 경험을

더 위에 두는 듯한 겸손도 느껴져 더 좋은 것 같다.


‘오죽하면’과 ‘어쩔 수 없다’..


두 말은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황에서

비슷하게 쓰이는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쩔 수 없다’는 자기 방어의 언어인 반면에,

‘오죽하면’은 공감의 언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영화를 만든 박찬욱 감독은 아마,


영화를 감상하는 동안의 우리의 시선이 ‘폭력’으로부터 영화를 감상한 후 ‘공감’으로 옮겨가,

영화를 보기 전보다 따뜻한 말로 세상을 정의하길 바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 덧붙이다


어느덧 불쑥 한가위가 다가오면서

변해가는 계절의 공기가 또다시,


지난 시간들의 나를 회고하게끔 한다.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상황들 속에서

‘나는 정말로 어쩔 수 없었을까…’


“두려움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도망치던 나였고,


도망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이 외면했던 나였다.


하지만 정말 어쩔 수가 없었을까?”…


돌아보며 과거의 선택들과 행동에 반성을 새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죽했던’ 어린 나에게

이제는 괜찮다며 위로와 안심을 건넨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없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던 것도 없다.


단지 우리의 선택과 그 결과만이 존재할 뿐.


‘두려움에 눈이 멀어 스스로를 속이고

진실된 마음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길’,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용기를 갖고

나의 가치는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고 있길’.


오죽했을 당신에게,


이제는 어쩔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