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하나의 나를 떠나보내며
1.
이틀 전, 임용 시험 1차 합격자 발표가 났다. 나는 그날 학교에 출근을 해야 했고, 출근을 하면 아이들의 생활기록부를 쓰느라 정신이 없을 예정이었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혹시나 오전부터 좋지 않은 소식을 마주하면 남은 근무 시간 동안 일할 의욕이 없어질까 봐, 그리고 혹시나 표정 관리를 못 할까 봐, 나는 처음으로 나의 합격 여부를 퇴근 후 뒤늦게 확인하기로 마음먹었다.
오전 10시가 지나고 내 결과보다 먼저, 다른 과목을 준비한 아끼는 후배의 결과를 전해 들었다. 그 친구가 어떻게 공부해 왔는지를 지켜보아 온 나에게, 그 과목은 이미 그 후배 그 자체였다. 내가 가장 쓰고 싶었던 지역을 포기하며 경기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그래도 그 후배와 같은 지역이라는 사실이 한 줄기 위로가 될 만큼 내 수험 생활을 함께해 준 소중한 동반자였던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의 불합격 소식은 사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후에 확인할 내 시험 결과와 상관없이 이 시험 제도에 대해, 아니 이렇게 적은 수의 인원만이 합격할 수 있는 현 상황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게 만든다. 비단 중등교사 임용 시험을 준비하는 우리들뿐 아니라, 다른 모든 직업을 갖기 위해 애쓰는 모든 사람들이 너무나 힘든 것을 알고 있어 우는 소리를 하는 게 민망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정말 어딘가에라도 화를 내고 싶었다.
그 소식에 뒤이어 나는, 올해 중등 임용 시험 '국어' 과목의 1차 시험 합격 컷이, '서울' 지역보다 '경기' 지역이 더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3점이나. 다시 한 번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이 얘기를 들었을 때 내가 이 시험과 운때가 맞을 수 없는 사람인가 싶어, 내 결과를 알기도 전에 이미 기분이 상했다. 어떻게든 합격 확률을 높여 보겠다고, 내 입장에서는 연고도 없는 다른 지역에 원서를 썼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은 것이다. 그리고 퇴근까지 남은 시간 동안 제발 합격했으면 하는 소망의 기도보다, 제발 '서울' 지역에 원서를 썼으면 붙었을 점수인데 '경기' 지역에 원서를 써서 떨어지는 것만 아니기를, 차라리 두 지역 중 어디에 원서를 썼든지 간에 무조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점수로 떨어지기를 더 간절히 바랐다. 만약에 작년처럼 또 똑같은 상황을 겪는다면, 그것도 내가 쓰고 싶었던 지역에 원서를 쓰지 않으면서까지 방어적 전술(?)을 펼친 결과가 그렇게 나온다면, 내가 너무 힘들어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꾸역꾸역 일을 하고 집에 와서 점수를 확인했다. 결과는 또다시 불합격. '서울' 지역에 원서를 썼다면 합격 컷보다 대략 1점 정도 부족해서 아쉬워했겠지만(심지어 작년보다 합격 컷과의 점수 차이가 줄어들었으므로), 나는 '경기' 지역에 원서를 썼기 때문에 아쉬워할 필요도 없는 점수였다. 그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점점 불합격 확인을 하는 것에 익숙해져서인지, 눈물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경기'와 '서울' 지역의 합격 컷, 그 3점 사이에 걸쳐 있을 무수히 많은 수험생 선생님들이 얼마나 속상할까 싶어 마음이 쓰였다. 그분들은 또 다른 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세 번째 낙방이다.
나의 미래까지도 다 내다보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물어보고 싶다. 내가 혹시 내 능력보다 너무 과한 것을 얻기 위해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인지, 그리하여 나는 이 길을 진작 포기했어야 하는데 내 오만으로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그게 아니라면, 나는 끝없이 이어진 듯 보이는 길고 긴 터널의 어디쯤 도달해 있는지, 그리하여 언제쯤 이 어둠을 벗어나 환히 쏟아지는 빛을 마주할 수 있는지.
2.
1차 시험을 치르고 합격자 발표를 맞이한 지난 한 달 동안, (코로나 상황 때문에 누구인들 마음껏 쉬고 놀고 그럴 수 있었겠냐마는) 나 역시 예상과는 다른 시간을 보냈다. 원래는 시험이 끝나고 보려 했던 지인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 있는 사립 학교에 시험을 치러 올라가려 했었다. 사립 학교의 시험이 어느 정도의 경쟁률인지 알기 때문에, (필요한 서류를 바리바리 챙겨서 원서를 내는 수고를 기꺼이 해 놓고도) 나는 내가 서울에 올라가는 수고가 그래도 무의미하지 않았음을 합리화하기 위해 보고 싶었던 지인들과의 약속을 함께 잡아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 상황이 그 무렵 심각하게 악화되면서 그런 내 계획도 당연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입장이라 당시에는 서울에 올라갔다 오는 것 자체를 고민했었으나, 이미 주어진 기회를 시도도 해 보지 않고 놓치기에는 너무 후회가 남을 것 같아 시험만 보고 오는 주말을 몇 번 맞이해야 했다.
그러다 어쩐 일인지, 한 사립 학교의 필기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응시자의 수는 180명(결시자를 빼면 대략 160~170명 정도 실제로 시험을 쳤으려나), 그 중 15명만이 필기 시험에 붙었는데(총 3명의 국어 교사를 뽑을 예정이라 5배수를 합격시킨 것이다) 그 안에 내가 속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바로 이틀 뒤 수업 실연을 해야 해서, 나는 서울에서 내려온 지 이틀 만에 연가를 쓰고 다시 서울에 올라갔다.
사실 이 과정 자체가 나에게는 무척 힘들었다. 작년과 재작년에는 임용 2차 시험을 미리 준비한다고 서울에 방을 구해서 머무르고 있던 상황이라 이런 시험 일정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도 크게 힘들지 않았는데, 올해는 일을 하는 와중에 이런 시험을 병행하려니 체력적으로도 힘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15명 중 단 5명만을 면접으로 보내는 다음 단계에서 떨어지면서, 더 이상 서울에 올라갈 일은 없었다.
나는 과연 저 열다섯 명 중 몇 등이었을까, 나의 수업 실력은 얼마나 많이 부족한 것일까, 내가 고등학교에서 근무해 본 경험이 있었다면 조금 더 나은 수업을 할 수 있었을까 자문하면서, 나는 빈 교실에서 잠깐 울었다. 붉게 충혈된 눈은 가릴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얼굴 전반에 묻어난 슬픔을 마스크로 가릴 수 있어서 그것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랜만에 첫 단계에서라도 '통과'의 기쁨을 운 좋게 맛볼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그런 기회를 준 그 학교에 대하여 고마운 마음이 들었던것도 사실이었다. 내 예상보다 길어진 수험 생활 동안 패배에 익숙해지고 있어서인지, 이런 한 번의 경험이 조금씩이나마 나에게 다음을 기약할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측면도 있으므로.
3.
사실 이곳에 글을 쓰면서 위와 같이 자세한 숫자를 굳이 밝힌 것은, (이 정도 경쟁률이라 그렇지) 내가 그렇게까지 무능력하지는 않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의 발로임을 알고 있다. 이 얼마나 옹졸하고 건강하지 못한 마음인가.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요즘 나에 대한 믿음을 이런 방식으로 겨우겨우 유지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인데,
몇 년간 나는 내세울 만한 결과를 얻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사립 학교의 시험 결과가 좋기를 꽤 많이 바랐던 것 같다. 내 마음 상태를 얘기하면서 '것 같다'와 같은 추측성 표현을 쓴 이유는, 표면적으로 내가 '결과에 대해 기대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주변 사람들에게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수업 실연에서 불합격하고 나서 내가 예상보다 너무 큰 허탈감과 실망감을 느끼는 것을 보고, 나는 '결과에 대해 기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런 '척'을 함으로써 (높은 확률로) 다가올 상처로부터 나를 방어하고자 하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모든 실패의 경험은 쓰라리지만, 한 단계 한 단계 더 위로 올라간 뒤 경험하는 실패는 더 깊은 상처를 남기는 것 같다. 위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느낀 (자제하려 해도 절제되지 않는) 기대감의 무게가 그만큼 나를 더 깊게 찌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운 좋게 그 열다섯 명 안에 포함된 뒤, 내가 좋아하는 지인들과 가까이에서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립 임용 시험의 결과와 상관없이 그 전에 내 수험 생활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행복 회로를 가동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번에는 최후의 최후까지 인정하기를 미루어 왔으면서도, 끝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어떠한 사실에도 직면하게 되었다. 나는 분명 사립 학교의 임용 시험에 합격하게 되면 내가 얻게 될 직업적 안정감을 바탕으로, 어쩌면 누군가를 마음 편히 만나고 예쁘게 연애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그렇다. 연이은 임용 시험(공립이든 사립이든)의 낙방이 나에게 가져다 준 상실감과 절망감의 기저에는, (내가 마음속 깊이 바라 왔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기에 바라면 안 된다고 끊임없이 세뇌해 왔던) 누군가를 만나서 행복해 하는 내 모습을 꿈꾸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부정적 전망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이 때때로 나를 잠식하려 할 때, 나는 종종 '유미'를 떠올린다. 지금은 완결된,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되었던 <유미의 세포들>의 주인공이었던, 우리 모두의 '유미'를. <유미의 세포들>을 사랑했던 독자들이라면 공감하겠지만, 우리 독자들 모두는 각자가 유미의 세포들이었던 것마냥, 유미의 행복을 바랐고 유미의 성장에 환호했다. 나에게 있어 유미는 어떤 면에서 나의 과거였으며, 나의 현재이기도 했으며, 내가 꿈꾸는 미래이기도 했다. 나에게도 어쩌면, 이런 불안정한 삶의 나날들이 지난 뒤 어쩌면, 이런 불안정한 삶의 나날들 속에서도 어쩌면, 나만의 '순록'을 만날 수도 있겠지. 물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나는 괜찮을 것이다.
'유미'도 그랬던 것처럼.
4.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조금씩 잃어 가고 있으면서도 나는 다가올 내년을 준비하고 있다. 이미 지난주부터 원서를 쓸 곳을 찾아보고, 원서를 쓰고, 서류 전형에서부터 탈락하는 경험을 하고 있다. 다가올 새해의 첫 달과 두 번째 달에도 이런 일들이 반복될 것이다. 내 서른두 살의 시작이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다. 사실 나의 서른한 살과 서른 살도 이런 시기로 기억될 줄 몰랐다.
그래도 일과 병행하면서 성적을 떨어뜨리지는 않았는데, '현상 유지'라는 최소한의 목표는 달성했는데, 한 번만 더 도전해 보아도 괜찮을까? 이건 너무 합리화인가 싶고. 조금만 더 버티면 나에게도 합격이라는 기적이 다가올까? 이건 너무 희망 고문인 것 같고.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내가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들은 온통 답을 알 수 없는 것들뿐이라,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한다.
어쩐지 나의 삼십 대가 애쓴 것에 비해 너무도 초라한 것 같아 눈물이 날 것 같았던 요 며칠, 그래도 이렇게 말해 주는 사람이 있어 지금 내 상황을 글로 남길 용기라도 낼 수 있었다.
"왜 실패를 과정 안에 안 껴 주지? 실패하는 것도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 포함을 시켜 줘야죠.
제리 맥과이어도 바닥까지 치고 다시 올라왔잖아요."
"고통에 익숙한 사람, 잘 견디는 게 디폴트(default)인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괜찮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돼요. 혹시 하고 있다면."
내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는 수험 생활 속에서 나는 나날이 별로인 인간이 되어 가고 있다. 누군가의 좋은 소식을 축하해 주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할 때가 많으며, 나의 상황이 어쩐지 부끄러워 선택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안부를 전하며, 내 힘듦이 다른 사람의 힘듦보다 더 크게 느껴져 공감 능력이 점점 결여되어 가는 듯하다. 내가 나 자신을 온전히 잃어버리기 전에 이 시기가 끝났으면 좋겠다.
언젠가 이 컴컴한 터널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올까. 나를 향해 쏟아지는 빛 속으로 온몸을 내던지는 순간이 정말로 올까. 그런 날이 온다면 그때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었던 이 시기를 잊지 않고, 그 속에서 불안해 하고 있을 다른 누군가에게 <런 온>의 작가님처럼 따뜻한 말이나 글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주고 싶다. 터널 안에 있는 사람에게 찰나의 순간, 한 줄기 빛이라도 비추어 줄 수 있도록.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수험 생활로 점철된 나의 서른 살 그리고 서른한 살도 무의미하지 않게 기억될 것 같다.
그러니 나는, 적어도 나 만큼은 올해의 실패 역시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 끼워 주기로 한다.
당신의 올해도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