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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ar Feb 25. 2023

마라톤을 위하여

지치지 않고 오랫동안 디자이너로 일하기 위해 필요한 것

러닝을 다시 시작했다. 러닝이라 하면 긴 호흡을 유지하며 10분 이상 달리는 모습을 상상하지만 나에게 그 정도 운동은 아직 너무 버겁다. 쉬지 않고 30분 달리는 것을 목표로 인터벌 트레이닝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 번에 최대로 길게 뛴 시간은 2분 30초. 일주일에 3번씩 달리고 다음 주가 되면 30초씩 시간이 늘어난다. 일상에서 30초는 길게 느껴지지 않는데 러닝 할 때 30초는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시간상 따져보면 2분을 넘었어야 할 시기인데 계속 2분에 머무르는 러닝을 했다. 매 번 뛸 때마다 몸이 어찌나 무겁던지 뛰는 시간을 늘려 ‘쉬지 않고 30분 달리기’ 목표를 지키는 것을 포기하고 ‘꾸준한 운동’을 해내는 것으로 타협을 했다.


러닝을 할 때는 운동 어플에 있는 러닝 코치의 도움을 받아 남은 시간과 러닝 자세, 호흡, 운동복과 운동화 정보를 들으며 뛴다. 러닝 코치는 매 번 속도가 중요하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를 찾아 운동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페이스는 1km를 달릴 때 걸리는 시간으로 일정한 구간을 일정한 시간으로 달리는 것을 의미한다. 오랜 시간 동안 쉼 없이 페이스를 유지하려면 옆 사람과 간단한 대화를 하면서 뛰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은 정도의 속도로 달리기를 해야 한다. 속도에 욕심이 생겨 러닝 초반에 빨리 뛰면 초반 속도는 빠를지 몰라도 트레이닝 중반 지점에서 금방 숨을 헐떡이며 지치게 된다. 그러면 다시 속도도 뒤처지게 되고 페이스도 무너진 러닝이 된다. 좀 더 잘 뛰고 싶은 마음에 속도를 올리는 건 결코 좋은 운동이 되지 않는다. 


한 달 정도 꾸역꾸역 러닝을 하고 나니 일주일에 세 번 운동을 하는 것이 조금은 몸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러닝은 여전히 시작하기까지 ‘아 오늘은 그냥 넘어갈까’ 마음속 갈등이 얼굴을 들이밀었고 체력이 늘어나거나 살이 빠지는 뚜렷한 효과도 느낄 수 없었다. 꾸준한 운동을 위해 꾸역꾸역을 기꺼이로 바꿀 수 있는 포인트가 필요했다. 페이스를 단축하는 걸로 운동에 재미를 붙여보자! 새롭게 목표를 세우고 페이스를 단축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봤다. 페이스를 단축하는 방법은 의외로 ‘속도’가 아닌 ‘거리’에 있었다. 더 빨리 뛰는 것보다 지금의 속도로 더 많이 뛰는 것이 페이스를 단축하는 것이었다. 러닝은 단거리 달리기가 아닌 장거리 달리기에 속하는 운동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일을 하는 것도 러닝과 비슷하다. 사회에서 일을 하며 보내는 시간을 어림잡아 보면 40여 년은 충분히 된다. 긴 시간 동안 지치지 않고 꾸준히 내 페이스를 유지하며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회사와 상관없이 새롭게 일을 시작하고 적응이 끝날 때쯤 무기력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일 인분의 몫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에 앞으로 계속 일을 해야 할 시간을 생각하지 못한 채, 다른 이의 페이스를 쫓아가거나 오버 페이스로 일을 하니 금방 무기력해졌다. 그래서 나만의 페이스를 되찾기 위해 거리를 조절할 수 있는 요소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일과 나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만들자.

이 얘기는 워라벨 워라블 같은 의미보다 일과 나를 ‘동기화’ 하는 개념에 더 가까운 얘기다. 사전에 나온 동기화의 뜻은 다음과 같다. 

동기화(同期化) : 작업들 사이에 수행시기를 맞추는 것.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거나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일어나도록 시간의 간격을 조정. 

여러 개의 전자기기를 사용할 때 A에서 작업했던 내용을 B에서도 볼 수 있도록 일하기 편리한 환경을 만들 때 동기화 단어를 사용한다. 일과 나를 동기화한다고 표현하면 둘 사이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가 떠오른다. 사전적 의미를 보면 동시에 일어날 수 있도록 연결하는 의미도 갖고 있지만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일어나도록 시간의 간격을 조정하는 것 또한 동기화에 해당된다. 



제품, 서비스를 만들거나 기획하는 직업군의 사람들은 일의 결과물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결과물을 나와 동일시하는 동기화가 쉽게 생긴다. 그래서 다른 직업군보다 쉽게 동기부여를 받기도 하고 많이 상처를 받기도 한다. 내가 의도했던 것과 다른 형태로 결과물이 도출되었을 때,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소비자 반응이 좋지 않을 때, 회사 안에서 일하기 때문에 ‘나’라는 개인의 의견보다 ‘조직’으로 대표되는 회사의 의견을 따라야 할 때 같은 상황들이 있다. 


디자인을 하다 보면 하다 보면 내 의견을 관철시키는 것보다 상대방과 내 의견을 적절히 조율해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예쁘게 만들어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기업이나 제품이 처한 문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역할로 디자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디자인은 다양한 직무의 사람들과 협업할 일이 많은데 서로 논의하는 과정을 통해 디자이너가 보지 못하는 영역을 볼 수 있게 된다. 새로운 영역을 발견하면서 처음에 생각했던 디자인과 다른 방향으로 결론지어질 때가 많다. 
이 과정에서 동기화가 잘못되면 일의 결과물이 내가 생각했던 모습과 달라 쉽게 지칠 수 있다. 사람들이 결과물을 보고 말하는 것을 그걸 만들어낸 나에게 하는 얘기로 착각하여 일이 버겁게 느껴질 수도 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디자인을 하다 보면 디자이너가 좋아하는 멋진 디자인과 거리가 멀어질 수 있다. 
작은 슈퍼마켓, 대형 할인마트, 백화점에는 파는 물건이 다른 것도 있지만 겹치는 물건도 있다. 세 곳에 똑같이 있는 물건을 팔기 위해 디자인을 한다면 디자인의 컨셉은 전부 달라야 한다. 세 가게가 위치한 곳과 주로 방문하는 사람들이 다를 테니까.
우리는 보통 Behance나 Pinterest에 나오는 트렌디한 디자인을 예쁜 디자인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속해있는 조직, 브랜드의 특성을 고려하면 평소 보던 멋진 디자인과 다른 결의 디자인이 문제를 푸는 정답일 때가 있다. 예를 들면 트렌디함을 뽐내는 화려한 그래픽보다는 정보 전달을 우선순위로 크고 굵직한 글자를 배치해야 할 때 같은. 


생각하던 디자인 방향이 달라질 때 그리고 그것을 해내야 이 일을 끝맺을 수 있을 때 스트레스를 받곤 했었다. 디자이너로서 트렌드를 쫓지 않고 디자인 능력이 떨어지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름을 적어 디자인을 세상 밖으로 내는 건 아니지만 창작자인 나는 내가 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결과물을 볼 때마다 내가 저것밖에 못 하는 사람으로 한정되는 것 같았다. 
일은 일, 나는 나, 일정한 간격을 두고 조정하는 동기화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결과물이 만들어낸 시각적인 이미지에 집착하지 않고 만들기 전과 후 문제 상황 해결 여부만 놓고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맞는 길인지 확인하기로 했다. 나만의 페이스를 지키며 오랫동안 건강하고 행복하게 일을 할 수 있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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