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구룬파 유치원> with Audio
니시우치 미나미 글, 호리우치 세이치 그림, 동화 <구룬파 유치원>
[ 구룬파는 굉장히 큰 코끼리.
오랫동안 외톨이로 살아와서 매우 더럽고 지독한 냄새도 납니다. 외톨이 구룬파는 때때로,
'외로워, 외로워.' 하며 풀에 귀를 비벼대곤 했습니다.
그러면 굵은 눈물이 구룬파의 코를 타고 또르르 떨어졌습니다.
정글에서 구룬파를 둘러싸고 지금 한참 회의 중. 구룬파한테 냄새가 나서 코가 모두 하늘로 향하고 있습니다.
'구룬파는 다 컸는데도 늘 빈둥빈둥거려요.' 친구 코끼리가 말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훌쩍훌쩍 울어.'
'그럼, 일을 하게 내보내자.'
'그래, 그래.' ]
그렇게 속 깊은 코끼리 친구들은 구룬파를 깨끗하게 씻겨서, 세상을 나가는 그를 마중한다.
[구룬파는 몰라 볼 정도로 멋지게 변했습니다.
자, 활짝 웃으며 출발!
맨 처음 구룬파가 간 곳은 비스킷 가게의 비- 아저씨네.
구룬파는 있는 힘을 다해서 아주 커다란 비스킷을 만들었습니다.
"특대 비스킷 1개 1만 원."
그런데 비스킷이 너무 커다랗고 비싸서 아무도 사지 않았습니다.
비- 아저씨는 "구룬파야. 이제 비스킷 만드는 일은 그만두어야겠다."
라고 말했습니다.
구룬파는 풀이 죽어 커다란 비스킷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
그다음 접시 공장에서도, 구둣가게에서도, 피아노 공장에서도 자동차 공장에서도 구룬파가 만든 것들은 너무 커서 해고된다.
[ 구룬파는
더,
더,
더,
더욱
풀이 죽었습니다.
구룬파는 몹시 실망해서
비스킷과
접시와
구두와
피아노를
자동차에 싣고 나왔습니다.
또 이전처럼 눈물이 나려고 했습니다.
한참 가자 아이가 12명이나 있는 엄마가
"아, 바쁘다 바빠. 셔츠가 12장에, 반바지도 12장, 앞치마가 12장,
양말은 24짝. 바쁘다. 바빠." 하며 빨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구룬파를 보자 "미안하지만 아이들과 같이 놀아 주겠니?" 하고 부탁했습니다. ]
[ 구룬파는 유치원을 열었습니다.
구두에서 숨바꼭질도 할 수 있습니다.
접시에 물을 가득 채워 수영장을 만들었습니다.
구룬파는 이제 외롭지 않습니다.
비스킷도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
"장애가 있다고 생각하고 키우면 되잖아."
오 년 전, 내가 스물여섯이었을 때, 뮤지컬 오디션을 보러 다니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 시기, 덜 떨어진 댄스코치의 말을 듣자마자 교환할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던 기억이 다시 떠오른다. 그 말을 듣고 조금 휘어진 코를 가진 15cm의 코끼리 인형 에이치를 데리고 다시 집에 돌아왔던 순간과 이 동화책의 구룬파의 여정은 참 많이도 닮아있다. 지금의 에이치는 휘어진 코 같은 건 아쉬울 것 하나 없이, 그저 누가 봐도 똑똑하게 생겼고, 상당히 귀여우며, 아주 좋은 리스너인 코끼리일 뿐.
내가 그 사람의 말의 뒤편에서 들었던 건 단 하나였다.
"세상에는 급이 있어. 그러니 모자란 걸 곁에 두고, 우월감을 느끼면서 살아."
당신은 우월감의 다른 이름인 열등감을 다른 이에게 투사하는 사람일 뿐. 이 코끼리 하나에게서조차 얻을 수 있는 감사 같은 건 당신의 삶에는 없어.
한두 달 후 말없이 그곳을 그만두며, 나는 다른 곳을 다니기 시작했었다.
참 신기하게도, 온통 결핍과 외로움이 가득했던 구룬파는 구두, 피아노, 접시, 비스킷, 자동차까지 모두 아주 크게 만들어버린다.
왜 그랬을까? 세상의 기준에선 그게 실패작이지만, 구룬파의 기준에선 이건 보통이라서?
그것도 맞다. 근데, '있는 힘을 다한 게' 문제가 된 것 아닐까 거꾸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두 번 다시는 외롭기 싫고, 예전의 더럽고 은둔한 내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니까.
일이든 사람 사이의 관계든 최선을 다했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닌 것처럼 구룬파도 그렇게 실패를 다섯 번이나 겪어버린다. 그래도 참 기특한 코끼리가 아니던가.
그렇게나 실망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아도, 나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를 찾아서, 어디론가 또 향하고 있었으니.
그렇게 다른 누군가에겐 쓸모없었던 구룬파의 비스킷과 접시와 구두와 피아노와 자동차는, 12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를 만나서, 구룬파 유치원의 장난감, 수영장, 간식이 된다.
삶이란 결국 그렇다.
비스킷, 접시, 구두, 피아노, 자동차.
다 실패였던 것들이지만, 유치원에서 그 전부가 필요한 도구가 된다. 구룬파는 작게 만드는 법을 배워서 사회에 맞추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딱 맞는 순간을 만났을 뿐이다. 부끄러운 실패들, 버려진 것 같은 순간들이 있어야 더 나은 나를 만날 수 있다.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노동'을 하란 말이 아니라, 자꾸 시도하고 발견해 봐야, 반짝반짝 빛나는 나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나를 품어주는 세상과 마주할 수 있다.
나는 휘어진 코 하나 때문에 포기하려 했던, 작은 코끼리 인형을 아직도 곁에 두고 있다. 그리고 이 친구는, 구룬파처럼, 나를 외롭지 않게 해주는 늠름한 하우스 매니저의 직책을 아주 잘 수행해주고 있다.
타인이 보기에는 30대 초반의 여성이 이 조그마한 코끼리 인형과 함께 나누는 모든 순간과 대화가 유치해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누가 보기에 휘어졌든, 커다랗든, 유치하든 나에겐 전부 필요한 삶의 조각들이다. 그 조각들이 있어야, '나라는 유치원'이 열린다. 누군가, 잠시라도 쉬어갈 수 있게.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의 커다란 비스킷이 외면당하고, 평가와 교정이라는 단어로 외면하곤 한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가 세상에 내보인 '너무 큰 것들'은 실패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다.
정말로 문제였던 건, 받아줄 상상력이 없는 세상이었을 수도 있으니까. 실패로 쌓은 것들이 한 아이의 세상을 바꿀 힘이 될 수도 있으니까.
여담
쓰다 보니 내가 연기를 가르쳤던 아이들도 생각이 나고, 가끔씩 10대, 20대 초반의 댄서들이나 아이돌들을 보면 웃음이 나는 이유도 뭐 그런 것 같다. 가능성 너무 빛나는데 다들 예쁘지 않나.
가끔 주눅 들어서 저 못할 거 같아요, 안될 거 같아요, 하고 눈치 보고 그러면 너무 안타까워. 일단 해보지. 하긴, 너희는 평가의 세상에서 살고 있지.
너무 예쁜데, 왜 가르치는 사람들이든 학부모들이든 도대체 이런 애들한테 "내가 무조건 맞으니까 이렇게만 하라"면서 화내지? 이 생각 종종 했었다. 어차피 애들은 자길 떠나서 언젠가 독립할 수밖에 없단 걸 모르나. (물론 나도 가르칠 때 참다 참다 화나면 장난 없음. 지금은 교육 안 하고 있지만.)
내가 "이렇게 해봐- 칭구" 하고 말해줬는데, 나한테 되게 엄마 같다면서 웃던 열아홉 살 댄서오빠 어떻게 해. "언니, 언니" 하면서 손 잡아오는 애들도 그렇고, 내 생일 때마다 장문으로 카톡 보내주는 애제자도 그렇고. 우리 제로베이스원의 막내 유진이도.
정말 귀여운 아기 코끼리들이야. 나도 아직은 아기 코끼리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