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소매 붉은 끝동> 대본집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대본집
p.251 덕임의 대사
[그저 진심으로 미안하다, 한 마디면 끝날 일인데...
저하께선 사과라는 걸 하실 줄 모르십니다.
(산 : 나더러, 아랫사람에게 사과하는 법을 배우란 말이냐?)
예, 배우십시오. 세상 모두가 저하의 아랫사람이며, 그들 모두가 저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아랫사람에게 사과하는 법을... 백성에게 사과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진정한 군주는 늘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며, 백성에게 머리를 숙인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실 모르는 저하의 모습에, 소인은 지금 크게
실망하였나이다.]
내 인생 드라마가 몇 작품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옷소매 붉은 끝동>이다. 정조 이산과 의빈 성덕임의 서사. 한동안 이 드라마의 여운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었고, 수많은 대사들이 가슴에 콕콕 새겨졌었다. 그중 하나가 이 대사였다. 정체에 대한 오해를 풀지 않고 자신을 속인 세손을 원망하며 바른 소리 하는 생각시 덕임.
기존 배우들의 연기를 잊기 위해 대본만을 있는 그대로 읽고 내 방식대로 풀어서 읽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생각하는 덕임의 심리가 나오더라. 두렵기도 하고 아직 어리고 눈치도 보이고 군주에게 되나 할지언정, 내가 생각하는 백성의 입장은 이런 것이라 하는 꼿꼿함. 산은 덕임의 그런 면모를 사랑한 걸까. 사랑은 모르겠고, 덕임의 생각은 나와 일치하는 점이 많다.
내가 어떤 우위에 있으니까,
나의 체면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잘못을 해놓고도 사과를 하지 않는 이들이 많다. 타인에게 그 모든 감정을 떠넘기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참 산은 덕임에게 잔인한 사람이다. 자신의 감정 때문에 궁인으로서, 어떤 자신의 삶과 꿈을 펼치며 살아가고자 했던 한 여자에게 집착했던 사람. 자신의 것으로 그녀를 만들고 싶어서 그녀를 품고 나서도 몇 번이고 덕임에게 '내 것'이라 한 사람. 그렇지만 자신과 함께 하며 행복을 잃은 그녀를 야속해한 남자.
할아버지처럼 사랑하지 않겠다고 한 그 말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말인지 군주의 옷을 입은 그 아이 같은 남자는 몰랐으리라. 이미 시작부터 덕임은 그 말들이 얼마나 말 뿐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니 생각시이면서도 한 나라의 세손에게 소리를 냈겠지. 사과하는 법을 배우라고,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맘을 얻지 못하리라고.
압박감과 불안을 끌어안고 높은 자리에 올라, 모든 것을 감내하고, 한 남자의 눈에 어떤 이의 꿈이 아무리 환장하게 예쁘면 무엇을 할까.
그 무게에 짓눌리는 자신과 타인을 돌아볼 마음과 그 꿈을 진심으로 지지하고 응원할 마음이 없다면 말은 말 뿐인 것을.
진정으로 덕임이 원했던 걸 결코 모르지 않았기에, 산은 '연모한다'는 말을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덕임이 백성이었기에, 아랫사람이었기에, 대등하지 않은 존재였기에, 내어주었다 여겼으나 내어준 것 하나 없고, 단 하나도 내려놓지 못한 그 욕심 하나 때문에.
결코 덕임을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덕임이었다면, 그런 그를 결국 사랑하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대본 속 덕임과는 그런 점이 다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