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가계부
약 3년을 일하고 받은 퇴직금은 고작 800만 원이다. 코딱지만 한 퇴직금으로 6개월간 잘 버텨보자 다짐했으나, 퇴직금 중 절반이 백수가 된 지 한 달 만에 날아갔다. 누구를 탓하랴, 범인은 바로 나 자신인데.
퇴사 전 가장 굳세게 결심했던 것은 돈을 아끼자는 것이었다. 이제 수입이 전혀 없을 테니 무조건 돈을 아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 다짐했다. 본가로 돌아가면 월세 등 큰 지출이 없을 것이고, 식비나 생활비도 줄어들 것이니, 절약하는 것이 어렵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나의 경제관념은 생각보다 더욱 놀라웠다. 정신 차려보니 평소 한 달 지출의 약 세 배가 되는 돈을 써버린 후였다. 참담한 심정으로 가계부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퇴사까지 했는데 여행 한 번쯤은 가야지, 하며 플렉스. 거기에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애플워치, 노트북, 이북리더기까지 플렉스. 이제 출근도 안 하는데 옷과 신발을 왜 이리 많이 샀으며, 곧 이사 갈 것임에도 생필품에 몇십만 원을 쓴 것은 무슨 경우일까. 식비는 직장 다닐 때와 비슷하다면 다행인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감도 안 온다.
억울하다. 그렇다고 내가 사고 싶은 것들을 다 샀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매일 돈을 아끼기 위해 고심하고, 욕구를 통제했다. 새벽에 쇼핑을 하고 다음 날 아침 환불 요청한 대견한 날도 있었다. 식비를 아끼기 위해 매일 간장계란밥을 먹고, 가끔 샐러드를 조금 먹었다. 샐러드에 부라타 치즈를 얹은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일까. 하지만 이왕 먹는 거 맛있게 먹고 싶었다. 어찌 되었든 정말로 먹고 싶었던 엽떡, 허니콤보를 마음껏 시켜 먹었으면 억울하지도 않을 터인데, 먹방을 보며 굶주렸던 시간들을 보상받고 싶다.
어떻게든 만회해야 한다는 심정으로 당근마켓을 통해 필요 없는 물건을 팔아 총 10만 원을 벌었다. 그런데 판매한 물건 중 필요한 물건이 있어 다시 새 제품으로 구매했다. 이사 준비를 하며 필요 없는 물건을 몽땅 가져다 버렸다. 한 시간 뒤 필요한 물건까지 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급하게 쿠팡 어플을 켰다. 공중분해 되는 돈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나. 그건 아마도 거스를 수 없는 흐름. 과소비라는 거대한 흐름이겠지. 이 또한 운명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내려놓는다.
꾸준히 우하향 중인 나의 통장이 안쓰럽다. 이렇게까지 꾸준할 필요는 없는데, 그동안 매일매일 성실하게도 결제를 해왔구나. 빼곡하게 차 있는 지난달 가계부를 보며, 이번 달부터는 긴축재정에 들어가리라 새롭게 다짐한다. 과연 나의 과소비는 언제쯤 끝날 것인가, 누가 나를 좀 멈추어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