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방에게, 고마워
이사 전날, 방이 점점 낯설어질수록 내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지난달 퇴사를 했고, 이제는 다시 본가로 돌아가기 위해 내일 이사를 한다. 퇴사라는 큰 변화 속에서 가장 힘든 것은 월급이 끊기는 것도, 정든 사람들과 이별하는 것도 아닌, 나의 자취방을 떠나는 일이다.
장소와 이별하는 것이 이리도 슬플 줄 생각도 못 했다. 일부러 이사하기 한참 전부터 이곳은 내 집이 아니다, 떠나야 한다고 되새겼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이곳에서 자유로웠고, 때로는 무너졌으며,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서로를 돌보았던 이 관계는 그 무엇보다 특별했고, 그만큼 떠나는 순간의 괴로움이 크게 느껴진다.
처음, 이 자취방으로 이사를 왔을 때 어색했던 나날들이 기억난다. 낯선 장소에서 잠들고 일어난 시간들은 조용하게 쌓여갔다. 내가 언제부터 이 공간을 이리도 좋아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공간에 대한 애정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지금은 우리 집이 세상의 그 어느 곳보다 가장 애틋하고 소중한 장소가 되었다. 단순한 나무와 콘크리트, 대리석으로 된 네모난 공간이 무엇이길래 이리도 애착이 가는 것인지. 공간을 채운 나와 내 물건들, 음식 냄새와 빨래 향기, 따라 부르던 노랫소리들 덕분일까. 이곳에서의 기억들, 느꼈던 다양한 감정들을 떠나기 전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자취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초반에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청소가 제대로 안 되어 베란다가 거미들로 점령당한 적도 있었고, 무거운 이불 빨래를 혼자 하느라 애먹었던 기억도 있다. 오래된 건물 탓에 냉장고와 에어컨, 전등은 번갈아 가며 고장이 났었고, 때문에 관리사무소와 다투기도 했다. 베란다에 말벌들이 벌집을 만들어서 119에 연락한 오싹한 기억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집 어디를 보든 좋은 추억들이 가득하다. 방 구석구석 내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내가 직접 고르고 조립한 가구들. 틈틈이 쓸고 닦던 창틀과 모서리들. 햇빛이 잘 비추지 않는 탓에, 조금이라도 빛이 드는 공간으로 시시각각 화분들을 옮기던 주말들. 좋아하는 재료들을 냉장고에 가득 쟁여놓고 주방을 온통 더럽히며 만들었던 파스타와, 파스타를 먹던 작은 내 책상. 커다란 노트북 하나를 놓으면 끝일 정도로 좁은 책상이었는데, 역시 시간이 지나니 이마저도 익숙해져 버렸다. 내가 좋아하는 연노란색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유튜브를 보며 혼자 깔깔대며 웃었던 순간들이 기억난다. 나는 내가 혼자서 소리 내 웃을 수 있는 사람인 줄 몰랐는데, 이곳에서는 가능했었다.
이 공간에 함께 있어 준 소중한 사람들과의 기억도 스쳐 지나간다. 나의 자취방이 궁금하다고 먼 곳에서 친구가 놀러 온 날이 있었다. 전날 미리 청소를 해놓고, 우리 집은 원래 깨끗하다며 시치미를 뗐던 기억이 난다. 내 방이 마치 나인 듯이, 깔끔하고 이뻐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친구에게 맛있는 요리를 대접하기 위해 며칠 전부터 각종 요리 레시피를 찾아보며 설레었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했을 땐 어느 때보다 뿌듯했다. 자취방 좋다고 감탄하는 친구에게 자랑스럽게 내가 꾸린 이 공간을 소개했었다. 이곳을 방문하고 잠시나마 머물렀던 그들이 있어 나의 기억 중 일부는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추억이 되었다.
우리 집은 8평 정도의 원룸으로, 작지만 나에게는 충분했다. 작은 공간이 빨리 시원해지고 따뜻해지듯이, 내 작은 방도 좋은 기억들로 빠르게 가득 찼다. 2년 정도 된 지금, 방 어느 곳에서도 편안함과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작은 덕분에 더 구석구석 세심하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에게 필요한 공간은 이 정도라는 것을 깨달았다. 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지금 이 크기만큼의 공간이 나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빛도 잘 들지 않고, 겨울에 추운 완벽하지 않은 집이지만, 오히려 그 불완전함을 메꾸기 위한 노력이 있어 평생토록 잊지 못할 공간이 되었다.
항상 조용히 쉴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었는데, 우리 집은 훌륭하게 그 역할을 잘 수행해 주었다. 휴식 공간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된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제 이 공간은 다른 사람들의 물건으로 채워질 것이고 몇 년 뒤엔 또 다른 사람의 보금자리가 되겠지. 이사 생각만 하면 자꾸 우울해져 우리 집의 단점들과 안 좋은 기억을 떠올려보지만, 울렁이는 마음이 쉽게 차가워지지 않는다. 핸드폰을 들고 집안 곳곳을 여러 각도로 찍어보았다. 내가 누워있던, 앉아 있던 그 자리 그 각도에서 이 장면을 남겨놓고 싶었다. 하지만 카메라가 그 실물을 다 담지 못해 아쉬움만 커져갔다. 이제는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을 내 방이다. 이곳에 마지막으로 발 디딜 순간을 떠올리면 자꾸만 시간을 멈추고 싶어진다.
나를 지켜주고 나를 성장시켜 준 나의 작은 방. 이곳을 스쳐 지나간 많은 사람 중 나보다 이 공간을 더 사랑할 순 없었을 것이다. 슬플 때 울 수 있고, 기쁠 때 웃을 수 있고, 아무 말 없이 멍때릴 수 있는 은신처.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우리 집. 함께 사계절을 보내온 조용한 친구에게 고마웠다고 말하고, 이제는 정말로 이별할 준비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