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떠나며
우리 집 빌라 뒤편 산책로에는 배롱나무 두 그루가 있다. 배롱나무는 이름만큼이나 그 진분홍 색의 작은 꽃도 참 귀엽게 생겼다. 배롱나무꽃은 한여름에 피어난다. 궂은 더위 속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 능소화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 나무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조그맣고 옹골찬 귀여움에 반해 처음 본 순간부터 ‘너는 내 나무다’ 마음속으로 점찍었다. 산책로를 지날 때마다 내 나무를 확인했다. 여름에 활짝 꽃피우고 가을 겨울이 되어 잎이 떨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봄에는 다시 푸른 잎이 돋아나고, 지금은 꽃을 피울 준비를 하는 단계인 것 같다.
이 나무가 처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2년 전 여름이다. 직장으로 인해 서울에 살던 나는 이곳 새로운 도시로 이사를 왔다. 낯선 도시와 낯선 집.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은 불편함은 설렘보다 불안함으로 더 크게 다가왔다. 그러던 시기, 여름밤 산책을 하다가 활짝 핀 배롱나무꽃을 보고 기분이 좋아져 한참을 구경했던 기억이 난다. 높지 않은 나무, 딱 눈높이에 꽃이 들어올 정도의 배롱나무는 한여름 동안 피고 지며 눈길을 사로잡았다. 어두운 한밤중에도 진한 빛깔을 뽐내고 있었다.
그 시기 이 도시는 나에게 감옥 같았다. 서울에 살다가 이렇게 작은 곳으로 내려오니 너무나 답답하고 지루했다. 어딜 가도 똑같이 생긴 거리와 건물들 때문인지, 사람들도 다 똑같아 보였다. 시내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논밭이 나올 정도로 작은 도시였다. 이렇게 도심과 논밭이 가까울 수 있다니, 서울에서만 자란 내가 지방에 내려와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가끔 지도 어플을 켤 때마다 내 위치가 서울이 아닌 다른 곳에 찍혀 있는 것이 현실이라 느껴지지 않기도 했다.
작은 이 도시에서 외롭다는 감정을 처음 느꼈던 것 같다. 특히 이사 후 몇 달간은 처음 느껴보는 감정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나는 원래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가족들과 떨어지고 싶어서 지방에 내려왔는데도 처음 온전히 혼자가 되어보는 경험은 당황스러웠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곳에 홀로 내려와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 되묻는 일이 많았다. 여기서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계속 혼자인 건 아닐까? 불안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 도시의 첫인상은 썩 별로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 도시가 좋다. 예전엔 단점이라 여겼던 것들이 이제는 장점처럼 느껴진다. 어딜 가도 똑같이 생긴 거리이지만 깔끔하고 쾌적한 길가와 건물들이 좋다. 그 단조로움 속에 곳곳이 숨어있는 맛집을 찾아내는 재미도 있다. 놀거리 없는 재미없는 도시이지만, 밖에 나가서 노는 것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이 정도면 충분했다. 굳이 필요 없는 요소들을 찾으며 내 환경을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나에게 필요한 것들은 여기에 모두 있었음에도.
무엇보다 이곳에서 새로 만난 인연들이 너무나 소중해진 만큼, 그들과의 추억으로 가득 찬 이 도시에 정이 많이 들었다. 동료이자 친구들, 옛 애인과 함께했던 장면들이 도시 어디를 가나 겹쳐 보인다. 식당, 카페, 마트, 영화관... 아무 것도 아닌 장소들에서 나눈 별거 아닌 대화들이 떠오른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맴돈다. 그때는 그 시간들이 이렇게 소중한 줄 몰랐다. 이 도시에서의 시간이 한정적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들과 더 진심으로 함께 했을 텐데. 언제든 다시 돌아올 날들인 양 흘려보낸 시간들이 희미해져 가기 전 계속해서 곱씹어본다.
혼자 보낸 시간 중 가장 많은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은 배롱나무가 있는 우리 집 빌라 뒤편 산책로이다. 가운데 하천을 끼고 양옆 큰 나무들과 꽃들이 심겨 있는 이곳은 걷고 싶을 때마다 자동으로 찾게 된다. 아침 출근길엔 꾸벅꾸벅 졸고 있는 새들을 보며 피식 웃곤 했었고, 날씨 좋은 날 오후 퇴근길엔 갔던 길을 되돌아가고를 반복하며 집에 가는 발길을 늦추곤 했다. 밤에는 하천의 세찬 물소리와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달리기를 하는 부지런한 사람들 틈에서 느리게 걷곤 했었다. 이 산책로가, 이 도시가 이렇게 쉽게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나의 집, 산책로, 첫 직장, 그 모두 아우르는 조용하고 단정한 도시. 심심하지만 고요한 특유의 이 도시가 지금은 나의 또 다른 고향이 되었다. 이제 떠나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야 익숙해져 가고 좋아하게 된 이 도시를 떠나야 한다니, 이별해야 하는 것들이 왜 이리 많은 건지 미련만 가득한 요즘이다. 아쉬운 마음에 떠나는 날을 하루라도 늦추고 싶어 마음속으로 디데이를 정해놓는다. 배롱나무꽃이 피는 것만이라도 보고 가자. 한여름에 피어나는 배롱나무꽃. 이곳을 언제 떠날지는 모르지만, 꽃이 피어나는 모습만은 보고 떠나고 싶다. 네가 그 진분홍 꽃을 활짝 피우면, 이제는 떠나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 홀가분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