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낭만은 언제나 억압과 핍박 속에서도 존재했다.
부산 미문화원 거리는 저녁만 되면 사람들이 골목으로 들어가 술집을 마주했다. 동틀 때까지 마시고 또 마시는 시간, 무수한 이야기들이 밤새 끊기지 않는 곳, 취하지 않으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곳이지만 그곳에는 소모되지 않은 청춘의 몸으로 노래하며 세상을 향해 포효하는 젊음들이 들락거렸다. 허름하지만, 아늑한 자리가 있는 주막 같은 선술집에는 주인아주머니의 걸쭉한 입담과 어울리는 동동주가 늘 우리를 불렀다. 낭만은 너무 곳곳에 있어서 이곳이 주는 추억은 낭만 축에도 끼지 못했다.
미문화원 길로 가는 길 큰 도로를 사이에 두고 바쁘게 움직이는 인쇄소들이 그 길 주변 곁을 지나 골목골목 즐비하게 있으며, 지하철역 중앙동에서 내려 부평시장 쪽으로 가다 보면 동광초등학교가 있고, 그 앞 골목을 따라 가면 보수동 헌책방 골목이 나온다. 그리고 책방골목 끝으로 가면 더 높은 곳으로 가는 계단들이 있다. 몇몇 계단을 올라가면 한쪽으로 집들도 보이고, 건물도 보인다.
저녁이 깊어지는 골목에 가로등이 천천히 켜지면 으스러지도록 추운 가난이 무섭거나 서럽지만은 않을 때가 있다.
헌책방 골목을 어느 만큼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그 중간에 교회가 있다. 나의 부산에 교회 십자가가 없었다면, 결코 20대에 내려야 할 뿌리조차 내리지 못한 채 흘렀을 것이다. 그곳에 존재했던 시간은 아마도 간절한 것을 찾아 헤맸는데 기도가 응답한 시간인지도 모른다.
교회로 가는 길에 있는 보수동 헌책방은 그렇다고 그 시절 처음 마주한 것은 아니다. 대학 시절 친구 집으로 놀러 와 여행을 다녔던 곳 중 한 군데가 여기다. 친구 집은 부산 영도다리를 지나야 했고, 그 시절 우리는 꽤 그럴싸하게 남포동과 자갈치시장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다가 술값이 모자랐던 그 친구는, 우리들의 은근한 허세인 ‘창작과 비평’을 자기 방으로 다시 기어 들어 가 거의 울다시피 하면서 들고나왔다. 작가를 꿈꾸던 우리의 신념이었던 무크지, ‘창비’를 소장하고 싶어 안달이 날 정도였던 날도 있었다. 결국 나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 기어코 창비를 품에 안았다. 딱딱한 하드커버를 한 창비는 그 자체로 작가가 된 양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랬던 우리들의 허세를 보수동에 팔면서도 끝까지 낭만을 부렸다. 가난을 위장한 자의 멋이다.
창비를 내다 팔아 술 한 잔을 먹을 수 있었던 꽤 쓸모 있던 시절, 그 기억은 생존으로 남아 낭만의 시작을 알렸던 유혹의 시절이다.
그때만 해도 내가 이곳으로 다시 와서 여행자가 아니라 일상을 사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상상은 하지 않았다. 다시 서 있는 보수동에서 보자면 그 시절 나는 세상 물정조차 몰랐고, 오로지 나의 조급한 상상력에 의지한 채 작가가 되기를 꿈꾸었던 순수의 시절이라 말해도 좋을 듯하다. 그때가 아마 스무 살이다.
그 친구는 부산 영도다리 근처 남항동에 살았으며 제법 부잣집의 외동딸이었다. 옷도 자신만의 스타일로 입었고, 유학 온 그녀의 씀씀이도 우리네보다 풍요로웠다. 막상 이야기로 듣던 그녀의 부잣집 외동딸의 안심과 부러움이 그만 영도다리를 건너는 순간 무너지고 말았다. 그녀는 나에게 또 다른 허영심을 부리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그래도 내 기준에서 부잣집 외동딸은 맞다.
영도다리 아래에는 유독 점집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남항동 일대가 점집처럼 느껴졌다. 대나무 깃대에 붉은 깃발이 흔들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가난하고 불안전한 동네로 보였지만, 그녀의 씀씀이와 염세적인 행동은 붉은 깃과 묘하게 어울렸다. 하늘과 점집을 연결하는 표식의 붉은 깃발이 유독 많아 보이는 남항동. 배들이 항구에 묶여 있고 그 바다는 가난한 안개와 바다 빛의 짜고 썩는 비린내가 나의 첫인상으로 짙게 들어와 버렸다. 우주의 끝과 맞닿아 있는 미지의 세계로 나간 이들이 집으로 안녕하며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붉은 깃에서 출렁이고,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방울 소리는 바닷길과 사람 길을 닿게 이어 준 영도다리의 깊은 슬픔으로 달랑거린다.
남항동의 붉은 깃발이 다시 떠 오른 것은 부산 자갈치시장 일대를 부산 사람처럼 일상을 살고 있을 때였다. 그날도 남포동 ‘바다네’라는 포장마차를 자주 가곤 했었는데, 그곳 주인 이모도 무당이다. 어느 날 바다네 이모 집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곳도 영도다리를 지나, 남항동 근처였다. 이모는 굿을 전문으로 하는 무당이다.
그 집에 들어가면 이모는 신을 모셔 놓은 곳에 사 온 수박을 먼저 올려놓고 절을 했다. 그때 그 수박이 무섭고, 먹어 보니 맛도 없었다. 나의 정서에 낯선 문화가 들이닥친 것이라 어지러웠다. 점집의 깃발을 낭만이라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것이 있지만, 그보다 더 암울했던 시대, 남항동의 점집에서 보수동의 교회로 우리를 불러들였다.
어느 순간, 나는 이방인임을 감춘 채 교회라는 공간에서 뿌리를 내리려고 안간힘을 다해 기생하고 있었다. 교회와 점집은 극한의 대비와 서로 섞일 수 없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곳곳에 있다. 그렇게 나는 과연 어떤 존재로 이곳에 있는지조차 헤맸다. 하지만,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것은 나의 교회는 하나님이 낮은 데로 임하고 나는 그곳에서 뿌리내리고 싶어 온몸을 부딪혀가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다.
보수동 헌책방 골목 그 깊숙한 곳에 하늘로 가는 계단, 그리고 점집에 대한 기억이 한 번에 와닿는 것이 어색한 조우지만, 그럴싸한 교집합이다.
2.
최루탄이 터지기 일보 직전 경찰들이 미문화원 일대 곳곳에서 사람들을 잡아가기 시작하면 보수동 책방은 샷시 문을 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이를 이리저리 뛰면서 틈 안으로 들어가 몸을 숨긴다. 교회까지 계속 질주하기에는 여러모로 힘에 부딪힌다. 그렇게 허세를 팔았던 보수동 헌책방은 다시 내 앞에 마주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에 모여들었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 그대가 가난한 자와 하나님의 나라로 가기를 원한다면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실 겁니다.
군부독재는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이들을 세상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때 교회는 우리를 서슴지 않고 받아 주었다.
숨죽이는 긴장감 속에서도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는 사람들, 기꺼이 좁게 앉아 있는 옆 사람들 위해 몸을 더 긴장한다.
낡고 낡은 지 오래된 나무 의자에 앉아 오늘 이 순간, 미문화원, 부평동, 동광동, 대신동 골목골목 길을 따라 숨죽이면서 보수동 헌책방의 샷시 안에서 잠시 멈추고, 경찰(잡새)들이 사라지면 하나둘씩 예배당으로 모여 자리를 채운 사람들.
그 안에 나의 숨결도 불그스름하다. 교회의 형광등 빛이 껌벅인다. 껌벅일 때마다 모든 사물이 흔들린다.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서툰 목소리로 집회를 이끄는 선배의 격앙된 목소리가 흔들리고, 여기에 왜 왔는지를 다시금 다짐하듯 내 옆자리의 낯모르는 이의 눈매도 흔들린다. 그렇게 흔들리는 시선을 부여잡고 있는 것은 우리의 순수다.
두려움이 아닌, 절박한 생존이 우리의 낭만을 씹어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