툇마루에 올려놓은 블루투스의 소리를 가장 크게 틀었다. 음악은 집 마당 저 끝에 있는 텃밭까지 울리고 홀로 있음을 메우듯 습이 올라가는 하늘과 땅에 울려 퍼진다. 벚꽃이 이미 지고 봄볕이 여름 한낮으로 직진하는 날이다. 더위를 받아들이기 위해 온 마음을 내려놓고 엉덩이 방석에 앉아 있는데 음악이 갑자기 뚝 끊기면서 전화벨 소리가 급하게 고요를 방해한다. 무심히 호미로 풀을 매던 손길이 순간 멈칫했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때 끊겼다 다시 급하게 연결되는 전화벨 소리에 갑자기 심장이 벌렁거리면서 불길한 생각에 순간 들고 있던 호밋자루를 밭에 그대로 던지고, 짙은 군청색 장화 발로 고랑을 뛰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휘청거렸지만, 용케 넘어지지는 않았다.
“무슨 전화일까?”,
“뭐가 그리 급한 전화길래…”
언제나 그랬듯이 불안은 찰나의 시간에 마주하게 된다. 아마도 오랫동안 뜻밖의 전화가 주는 불길한 소식을 자주 접한 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요한 시간과 잠시 평온한 마음이 깃들어 온 정신과 몸의 긴장이 풀릴 때, 그랬다. 특히 아이의 담임교사 번호나 연락이 없던 친인척들의 느닷없는 연락은 생각보다 불안이었다.
질서 정연한 시간, 단정한 경계는 오랜 습관이 만들어낸 생존일지도 모른다. 질서가 가지는 안정감으로 순간순간 지내지만, 조급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 하나로도 지켜 왔던 질서는 곧잘 깨지곤 했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질서에 내가 그만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질서는 그렇게 무의식에서 습관으로 나를 지배하고 나는 그곳에서 안정을 찾는다는 사실을, 꼭 깨지거나, 금이 가거나, 흔들릴 때 알게 된다. 오래도록 길들여지면서 쌓아온 습관이 날카롭게 울리고 있다. 그러다 휴대폰 가까이 가는데, 저기서 울리는 사건이 갑자기 일상적이고 쓸데없는 스팸이면 도리어 짜증이 날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그만 나한테 소름이 돋았다.
툇마루까지 뛰다시피 했지만 결국 전화가 다시 끊겼다. 부리나케 휴대폰을 들고 부재중 화면을 확인하는데 너무 오랜만에 찍힌 길동한 형 번호다. 뜬금없는 전화에 살짝 당황했지만, 이왕 달려온 김에 전화를 걸었다.
“동한이 형, 웬일이세요.” 형과 일상을 공유하지 않은 채 3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형이 나에게 전화할 이유가 없었다. 교회에서 청년 활동을 하던 20대 시절, 배가 고플 때 가끔 기독교 서점을 다니던 선배들에게 전화하곤 했다. 그 당시만 해도 기독교 서점도 제법 잘 되던 시절이다. 우리는 장로님이 운영하시는 그곳을 아지트처럼 들락날락하며 넉넉한 아버지의 품을 느끼곤 했다.
공중전화 너머로 형은 기꺼이 밥과 술을 사 주러 나왔던 기억이 생생하게 났다. 그렇게 낭만이 존재했던 시절이 지난 어느 날, 형은 결혼과 함께 언니와 강원도로 이사를 갔다.
왜 나에게 무슨 일로 전화했을까? 서로가 알던 목사님이 돌아가실 때 만나고 다시 10년, 별생각 없이 걸었단다. 그리고, 우리가 알던 친구들이 세상을 떠난 이야기를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어제까지 만났던 사람처럼. 1987년을 지나 1990년대 초반을 지냈던 부산 사람들의 희미한 연들이 다시 생생하게 일어난다. 하지만, 형은 나에게 그들의 부고를 알리고 있다. 그것도 30년 치를 한꺼번에 나는 덤덤하게 들었다. 그리고 그 부고에 그 친구도 있었다. 30여 년 만에 전해진 젊은 날의 친구, 그런데 이미 죽은 지 여러 날이 지난 부고.
내가 살아 있는데, 내 기억 안에 아직도 20대인 그의 죽음을 듣는 것이 너무 낯설다. 형과의 통화는 제법 길게 이어졌지만, 그 친구의 소식 이후 아무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의 인상은 아직 청년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그는 봄날에 외롭게 죽었다고 한다. 아내와는 이혼했으며 자식은 한 명이라고 한다. 그와 나, 우리는 그저 교회 청년이었다. 감동적인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87년의 하늘 아래 함께 범내골로 부산역으로 다니다, 저녁이면 여러 선후배와 술 한잔 나누어 마시던 그저 그런 인연이었다.
그의 죽음을 전화기 너머로 듣고 나니, 10여 년 전 함께 교회에서 만났던 신발 수선공 형과 건설 현장 노동자였던 또 한 형의 죽음이 다시 상기되면서 애도하려 한다.
30여 년의 간극을 그가 어찌 살았는지 모른다. 평범한 연이었던 그를 생각하니, 불쑥 어떤 것을 생각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내가 만났던 형들과 그가 그다지 추억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발 수선공 형은 당시 비디오 가게를 함께 운영하고 있어서 우리는 떼거지로 자주 갔던 기억이 또렷하다. 아기공룡 둘리 비디오를 형의 가게에서 죽치고 봤던 것이 생생하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우리들의 목사님이 돌아가시는 장례식날 만나, 얼마 후 홀로 외로워하다 자신의 생을 끊어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허망하고 슬픈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시간의 빈 공간은 우리들 앞에 죽음이라는 다른 세상을 가져다 놓았다.
추운 날 용두산 공원 아래, 미문화원 뒤편과 중앙동 쪽으로 가는 골목 사이에 젊은 우리를 부르는 허름하지만 풍요로운 술집들이 많았다. 그곳에서 그날도 여러 명과 세상을 향해 정의로운 투사가 되어 열변을 토하면서 낭만과 고독과 현실을 마시고 있었다. 비록 돈도 빽도 없는 오직 젊음만 넘쳐 났던 나의 친애하는 동년배들이 찾아온 적이 있다. 그날, 인쇄 골목은 낡고 가난했지만, 나의 일상보다 세상의 정의를 이야기하는 심장들이 모였다.
주변에 사람들이 북적이고 사는 세상 이야기에 온갖 의미와 무게를 실어 놓고, 논쟁거리를 만들어 밤새 안줏거리로 씹어 삼키고 토했다. 청년이었던 그와 나는 많은 다툼을 했다. 왜 무슨 이유로 다퉜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날 이후 그를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만나지도 소식을 듣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때 조금은 안일했는지 모른다. 그날의 연이 다시 이어질 거라는 얄팍한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절연을 선언한 것이 마지막이 될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찬란한 순간에 만난 사람들이 아른거린다. 이제는 그 시절의 순수가 다시 살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돌아와서 숨김없이 정의를 공모하다 싸우지도 못할 것이다.
남은 자들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의 부고는 아직도 낯설다. 젊은 시절 인상이 아직 있어서 그런지 모른다.
우리가 만난 하나님은 사실 존재하는가를 끊임없이 물었다. 하지만, 우리들의 하나님은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있을 것이다. 신앙심을 키우지 못한 이유를 찾는다면 나는 가난한 자와 함께한다는 말씀을 단순하게 받아들인 나의 잘못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가난했기에 경쟁하지 않은 우리가 아름다웠다. 하지만, 가장 가난한 청춘이었는데 가장 풍요로웠던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미처 몰랐다. 아마 그날 싸우지 않았어도 지금까지 연락을 두절한 상태로 살았을 것이다. 세상 밖으로 나온 우리는 각자 흩어졌다. 뭉쳐야 산다는 식의 의식도 사라지고 오직 일하러 나갔다. 하지만, 일은 귀천이 있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먹고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분명하게 의식했다.
작은 교회에서 서로 위로해 주었던 목사님의 말씀도 가난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깊숙한 설움으로 들어갔다. 일상으로 돌아간 1987년 이후, 시간은 급속도로 빠르게 흘러갔다. 작은 교회는 흩어졌다. 각자 하나님을 찾아 다른 교회로 가거나, 신앙을 버리거나 그러다 소식이 끊겼다. 골방에서 주님의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 애쓰던 사람들이 민주화가 되는 과정에서 아래로 내몰리고 말았다.
노동자였던 선배들과 친구들이 하나둘씩 바뀌지 않은 자신들의 신분을 탓하게 되었고. 그것은 굉장히 지루한 절망이었다. 절망이 준 또 하나는 앞도 뒤도 없이 오로지 생존을 위해 오늘을 지탱해야 한다는 명분뿐, 숨 가쁘게 심장이 떨리던 그 순간에 바라던 꿈이라는 것조차 상실했다. 교묘히 파고들었던, 자신의 자존감도 직업에서, 돈에서 순간 밀리고 밀리다 어느 골목 쪽방으로 밀려들어 갔다. 이미 낭만은 사라졌고, 생존에서 밀린 우리들의 청춘은 다시 서서 앞으로 갈 힘조차 찾지 못했다.
세상은 조용한 일상을 원하지 않았다. 결국 1987년이라는 시대를 살았던 젊은 노동자인 나의 친애하는 친구와 선배는 세상을 떠났다. 이제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사실이 낯설다. 지난 시간이 아득하지만, 꿋꿋하게 하늘을 보고 있는 내가 세상을 떠난 동지들에게,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그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