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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호 Jul 02. 2024

아침 밥상, 그를 만나는 시간

깊은 새벽, 어김없이 아버지 방에 불이 켜졌다. 아들과 며느리가 혹여 잠에서 깰까 싶어 발끝을 조심하며 화장실을 다녀오신다. 그제야 사각사각 글을 써 내려가는 소리가 빼꼼하게 열린 문틈 사이로 들려온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글. 과연 저 노트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매일 쌓여가고 있는 걸까.

나는 이불속에서 아버지의 미세한 흔적 같은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다. 2년 전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 후 아버지는 어머니를 몹시도 그리워하셨다. 의아했다. 두 분이 생전에 저렇게 사이가 좋으셨었나? 얼마 전부터 기력이 떨어지는 아버지가 불안해 우리 집에서 함께 살게 됐다. 같이 지내게 되면서 나는 아버지의 새벽을 매일 만나게 되었다. 아버지의 작은 기척에 오늘도 안도하며 잠을 깬다. 새벽 5시.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입맛이 까다롭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아버지는 아이의 입맛으로 변해있었다. 반찬이 아무리 진수성찬이어도 사과 샐러드, 생선, 김이 없으면 밥을 드시는 게 시원찮다. 그런 아버지를 위해 일찍부터 사과를 깎고, 생선을 굽는다. 2인용 압력밥솥에 아버지 밥을 따로 안친다. 밥솥에서 ‘칙칙’ 소리가 날 때쯤, 아버지 방에 들어가 아침 식사를 권한다. 드디어 아버지를 만나는 시간이다.

아버지의 건조한 눈빛이 밥상을 흝는다. 요새는 얼마 전 육거리시장 맛집에서 사 온 만두에 꽂히셨다. 매일 만두 두 개를 국에 넣어 드리면 그것부터 드신다. 아침 밥상이 마음에 드시는 날이면, 금세 눈에 생기가 돌면서 당신의 세상을 들려준다. 오늘의 주제는 할아버지다.     

‘1945년 1월.

소학교 2학년인 아들 원진이를 안도에서 도문을 지나 한국땅 남양에 심부름을 보냈다. 춥고 배고파 우는 원진이를 겨우 달래 보내며 뒤에서 울었다.’ ⌜김창도 일기 중에서⌟     

할아버지는 1919년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홍범도 장군, 김좌진 장군 밑에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등 많은 무장독립운동에 참여하셨다. 그렇게 해방이 될 때까지 만주로 시베리아로 독립군의 역사와 함께 26년을 보내셨다. 37년생인 아버지는 만주에서 출생하셨고, 해방전까지 할아버지 심부름으로 압록강 너머에 자주 다니셨단다. 춥고 배고픈 길이었지만 아버지의 아버지가 무서웠고, 심부름 간 집에서 주는 떡 하나가 감지덕지해 거절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지금의 아버지만큼 고지식하셨던 것 같다. 해방 후, 군인으로 6.25 전쟁에도 참여해 공을 세우셨음에도 불구하고 우직하게 청렴과 청빈한 삶을 사셨다 한다.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가난이 힘들고 버거웠을 텐데 원망하나 없이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는 그저 속으로 짠하다.     

아버지는 일찍부터 온갖 험한 일을 하며 가장의 역할을 도맡았다. 그 와중에도 흥사단 활동과겨우 입학한 서라벌예대 문창과. 하지만, 현실은 아버지가 원하는 삶을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결국 가정과 세 아이를 선택하신 아버지에게 글은 언제나 갈증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칠십 넘어 광복회 충북지부장을 맡으며 보내 시간은 아버지에게 참 다행이었던 모양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삶이 주목을 받게 되었고, 그때부터 무엇인가를 노트에 적고 있는 모습을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더 세월이 흘러 이제는 기운 없는 하루를 집에서만 보내신다. 대쪽 같은 성격은 동네 경로당도 주간보호센터도 거부하며 오롯이 혼자 시간을 쌓아 갈 뿐이다.

그런 아버지에게 아들, 며느리와 함께하는 아침 밥상은 아침 한 끼의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허리처럼 자꾸 꾸부정해져 가는 시간을 잠시 기지개 켜며 밖으로 나오는 순간 !

아버지는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새벽에 할아버지의 역사, 당신 자신의 역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 정갈하게 몸을 단정하고 아침 밥상과 마주하는 시간은 잠시 세상으로 나오는 시간일 것이다.     

“아이쿠, 내가 벌써 88세네”

올해 설날 달력을 보던 아버지의 입에서 무심코 나온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아이 입맛으로 변해가는 아버지의 밥 위에 구운김을 올려 드린다. 생선의 살을 발라 슬쩍 숟가락 위에 놓는다. 내가 아이였을 때 아버지가 해주셨던 것처럼. 그 반찬들을 만족스럽게 드시며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88세 아버지. 이 순간, 그는 기운 넘치는 삶의 주인공으로 돌아와 있다. 그래서 더욱 그를 만나는 시간, 아침 밥상이 소중하다.     

나는 눈빛만큼 건조해진 피부에 로션 좀 바르라는 잔소리로 마음을 감추고 아침 식사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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