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빈티지를 입지 않아요

BETWEEN EIGHT 에피소드 8

by designwalkers

우리 같이 옷을 만드는 사람들의 머릿속 한쪽엔 '신상'이라는 쉬지 않는 발전기가 있는 듯하다.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혹은 길을 지나는 사람들을 마주칠 때나 어느 장소에서든 ‘저 사람이 입은 옷 예쁘네, 살짝 변형해서 샘플을 만들어 볼까?’라고 메모를 하곤 한다. 마치 직업병처럼,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옷깃이나 밑단에 머무는 것. 이런 식으로 디자인을 차곡차곡 모으는 것 또한 습관처럼 하는 행동이다.


자료 정리는 잘 못하는 성격이라 이 폴더 저 폴더 두서없이 쌓아둔 탓에, 클라우드에 저장된 사진들만 해도 용량이 굉장하다. 신상에 집중하는 시즌에는 클라우드에 있는 자료들을 한 번씩 찾아보곤 하는데, 예전 ‘Five Pound’ 시절에 찍어두었던 구제 옷들의 사진도 상당하다.


당시는 내가 지금처럼 여성복을 직접 디자인하고 만들 거란 예상은 하지 못했다. 단지 유니크한 디자인의 옷들이라 한 번 팔리면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별생각 없이 찍어 두었던 사진들이, 이제 와서 보니 내 감각의 뿌리가 되어준 훌륭한 레퍼런스였다.


다시 그때의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18개월 정도 구제 매장을 운영하면서 특별한 이슈는 없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 제자리만 걷는 것 같은 현실이 나를 짓눌렀다. 켜켜이 쌓인 먼지 냄새가 밴 구제 옷들처럼 내 삶도 퀴퀴하게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구제 더미에서 물건을 골라 생업을 이어간다는 너저분함과 가끔 생기는 손의 상처들, 그리고 이 길이 나의 엔딩까지 이어지면 어쩌나 싶은 두려움이 매일 밤 나를 힘들게 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구제 창고에서 물건을 고르던 중, 옷 더미 사이에 가려져 있던 유리 조각에 손을 크게 베이는 일이 있었다. 날카로운 통증보다 더 아팠던 건, 피 묻은 내 손을 감싸 쥐며 H가 보여준 침묵이었다. 이 일로 인해 내가 물건을 어떤 식으로 가져오는지 H가 알게 되었고, "너 정말 힘들었구나"라는 말 한마디보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빛과 표정이 나를 더 슬프게 했던 것 같다.


이때부터 나는 빈티지를 입지 않는다. 굳이 그때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다.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던 찰나, 이제 구제 옷은 그만두고 동대문에서 여성복을 사입해서 매장에서 판매하면 어떻겠냐는 그녀의 제안에 나는 바로 수긍해버렸다. 언제나 그렇듯 슬픔이나 아픔에 머무르지 않고 항상 앞을 향하는 H의 자세는,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게 만들어준다.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엔 구제 의류 판매는 정리하기로 했다. 마치 지난 실패를 덮어버리겠다는 듯, 우리는 오렌지 색상의 매장을 흰색 페인트로 갈아엎는 것을 시작으로, 직사각 타일 바닥도 노출 콘크리트로 바꿔 미니멀한 분위기로 전환했다. 매장 내 가구들도 톤에 맞게 직접 만들어 전부 교체한 뒤 ‘URBAN CORNER’란 상호를 걸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공사비를 아껴야 했기에 바닥을 제외하곤 H와 함께 모든 인테리어 작업을 직접 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이때부터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인테리어 공사를 할 때면 항상 H나 나나 똑같이 하는 말이 있는데, 바로 “다음에 인테리어 하게 되면 무조건 업자한테 맡기자. 너무 힘들다.”였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우리는 거의 모든 작업을 직접 하게 된다.


동대문 도매 시장은 오래전 누나를 따라 자주 다녔던 곳이라 어찌 보면 그리 낯선 곳은 아니었지만, 내 가게의 물건을 하러 온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많이 다른 듯했다. 특히 여성복 쇼핑몰이 호황이었던 시절이라, 가장 젊은 감각에 단가 면에서도 합리적인 ‘디오트’ 상가를 주력 사입처로 정했는데, 문제는 ‘어떤 옷들을 사입해야 하는가’였다.


H 역시도 내가 혼자 사입을 한다는 것은 무리라 생각했고, 직장 생활을 병행하며 사입을 함께 하기로 했다. 그렇게 혼자가 아닌 둘이 되어 URBAN CORNER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가 우리가 함께하는 우당탕탕 사업의 시작이었다.


매장의 인테리어뿐만 아니라 상품 구성과 진열 방식도 기존 구제 매장과는 완전히 다르게 바꿨다. 우선 여성복 코디가 서툰 내가 매번 DP를 고민하느라 허비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벽에 옷을 치렁치렁 걸어두던 방식은 과감히 없앴다. 대신 이너, 하의, 아우터 순으로 행거를 채워 자연스럽게 세트 구매를 유도했고, 매장 전면 행거에는 ‘특가 코너’를 마련해 저렴하고 베이직한 아이템을 컬러별로 진열했다. 물론 이 모든 아이디어는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매장이 될까'라는 H의 치열한 고민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사업 실패로 내향적으로 변한 내 성격과, 원래 낯선 이에게 말을 잘 걸지 못하는 H가 만나 드센 동대문 상인들을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분위기에 적응하기까지, 그리고 ‘어반코너’만의 무드를 잡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당시 호황이었던 도매 매장들은 쉴 새 없이 전화 주문을 받고 물건을 포장하느라 전쟁터 같았다. 그 속에서 직원들에게 가격을 물어보는 것조차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고작 컬러별로 1~2장 주문하는 우리가, 스스로 위축되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린 정말 열심히 시장을 다녔다. 장사가 잘되든 안 되든, 매장에 물건이 몇 장 나가지 않았을 때도 빠짐없이 판매된 물건을 채우고 신상품을 추가하며 매일 밤 동대문으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변화로 인한 기존 단골들의 이탈로 떨어진 매출은 새로운 고객들로 채워져 갔고, 어느 정도 매출이 올라온 후엔 함께 일할 매장 직원도 생겨나며 순조로운 항해가 지속되었다.

피곤함을 이기고 매일 밤 출근하듯 가는 동대문 도매 상가는 북적북적 사람들로 가득 찬 풍경,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매장들, 여기저기 울리는 주문 전화들, 현금 다발을 들고 물건을 걷어 가는 사입 삼촌들, 그리고 새벽 사입의 허기를 달래주던 ‘아딸’의 떡볶이까지…. 그 치열한 활기 덕분이었을까. 이때부터 동대문 도매시장은 내가 가고 싶고, 일하고 싶은 곳이 되었다.


매일 보는 그 풍경들 속에서, '나도 이곳에서 성실히 장사를 한다면 비록 크게 성공하지는 못할지언정 남은 부채를 더 빠른 시일 내에 정리하고 미래를 도모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굳어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나의 새로운 변화는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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