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WEEN EIGHT 에피소드 3
아침에 조금이라도 늦게 일어나면 운동을 가지 않는다. 오늘 계획한 일에 지장을 주고 싶지 않아서다. 운동을 건너뛰면 시간은 벌 수 있지만, 하루를 시작할 정신적인 에너지는 부족해진다.
특히 11월 들어 A 업체의 리오더가 줄어들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겨울철 주문 감소는 지난 몇 년간의 경험으로 예상했던 바지만, 올해는 유독 심하다. 9월까지 최고치를 기록했던 주문량이 10월부터 하락세가 시작되더니, 11월에 접어들자 마치 코로나 때를 연상케 할 정도로 급감했다.
원인을 고민해 본들 이미 답은 알고 있고, 반성 또한 진행 중이다. W 업체의 첫 런칭 준비에 흥분을 넘어 광분에 가까운 에너지를 쏟느라, 정작 A 업체를 소홀히 했던 시간이 지금의 결과로 돌아온 것이다.
매출 비중을 따져 보면 전체의 98%는 A 업체와의 거래에서 나온다. 이 수치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우리를 먹여 살리는 곳은 고민할 여지 없이 A 업체다.
몇몇 업체를 거쳐 현재 내가 서포트하는 곳은 A 업체와 W 업체, 두 곳인데 이번 이야기는 그중 2025년 봄부터 함께 일하게 된 W 업체와의 만남에 관해서다.
앞서 말했듯 A 업체의 겨울 매출은 매년 날씨만큼이나 차갑다. 오더가 줄어드니 겨울에는 자연스레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 그 틈을 타 출장을 핑계 삼은 여행을 떠나거나 집중해서 독서를 하기도 한다. 특히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많은데, '상상 속 계획'을 다시 상상하며 히죽거리는 날도 많다.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린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특히 프로모션 업무와 관련해 거래처를 늘려 볼까 하는 고민을 간헐적으로 하곤 하지만, 늘 생각에 그칠 뿐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아 왔다.
그러던 중, 여성복 사입 쇼핑몰을 추천하는 유튜브 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었고, 영상에서 소개된 W 업체에 관심이 생겨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그들이 보여주는 룩이 퍽 좋았다.
W 업체의 쇼핑몰을 체크하던 중, 판매되는 몇몇 아이템은 내가 자주 사용하는 원단을 사용한 제품이었고 가격이 조금 비싸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자체 제작 카테고리에는 달랑 두 품목만 올라와 있어, 이제 막 자체 제작을 시작하는 업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이 업체에 컨택해 보기로 마음먹고,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먼저 W 업체 사이트의 전체 상품을 확인하여, 예전에 사용했던 원단과 동일한 상품들을 추려냈다. 선별한 아이템을 우리 단가에 맞춰 계산하고, 기존 공급가를 예상한 후 우리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가늠해 보니 우리 단가라면 그들에게 충분한 이점을 줄 수 있을 듯했다.
나는 얼굴이 두꺼운 편이 못 되어, 업체에 전화를 걸거나 무작정 찾아가는 영업은 엄두도 내지 못하기에 대신 인스타그램 DM으로 조심스럽게 연락을 남겼다.
동대문 D 상가에서의 6년 도매 경력과 현재의 프로모션 업무를 간단히 소개한 뒤, 본론을 꺼냈다. 현재 그들이 판매 중인 'C' 셔츠와 'F' 티셔츠를 예로 들며 우리가 맞춰 줄 수 있는 공급가를 제시했고, 자체 제작 라인을 확장하려는 시점인 듯하니, 그 파트너가 되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또한 기존 A 업체와의 거래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가 어떤 식으로 업무를 서포트하는지 꾸밈없이 적어 보냈다. 어차피 부풀려서 이야기해 봤자, 함께 일하다 보면 전부 들통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히 고객이 제시한 상품만 만들지 않는다. 업체가 요청하는 상품(OEM)과, 시즌의 필수 아이템 및 톤앤무드에 맞춰 우리가 제안하는 디자인(ODM)을 50 대 50의 비율로 진행하고 있다.
ODM 상품을 적극적으로 제안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클라이언트는 촬영, CS, 사이트 운영, 홍보 등 신경 쓸 일이 너무 많다. 그러다 보면 상품 기획에서 놓치는 부분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 빈틈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업체에 맞춘 샘플을 만들어 제안한다.
물론, ODM 비중이 늘어나면 우리 매출에도 큰 보탬이 된다. 장당 마진이 높지 않은 프로모션 업무의 특성상, 전체 출고 수량을 늘리는 전략은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계정만 덩그러니 있는 우리 인스타그램에 답장이 도착한 건 바로 그날 밤이었고, 이렇게 빠른 답장이 올 줄은 몰랐다. 연락이 올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은 있었지만, 기다리는 내내 마음은 조급해 있었다.
DM으로 현재 제작하는 스타일 등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를 나눈 후,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며칠 뒤 첫 미팅을 약속했다. 사실 나는 기존 거래처들과 철저히 비대면으로 업무를 진행한다. 특히 A 업체와는 거래를 시작한 지 4년째에 접어들지만,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 본다면, 너무나 이상한 방식이라 생각할 것이다.
W 업체가 마음에 든 이유 중 하나는 위치였다. 이대 근처에 사는 내게, 망원동에 있는 그들의 사무실은 여차하면 금방 만날 수 있는 매력적인 거리였다.
그렇다고 첫 미팅부터 낯선 외부인을 사무실에 들이는 건 상대에게 부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사무실이 아닌 외부 장소를 제안했고, 망원동의 한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막상 미팅이 잡히고 나니, 처음 겪는 대면 미팅이라는 상황은 내게 큰 긴장감을 주었다. 그저 꼭 필요한 이야기만 빠뜨리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고, 이야기할 주제들을 순서대로 정리해 노트에 적은 뒤 첫 미팅 장소로 향했다.
나는 내가 약속 장소에 미리 도착해 있는 것은 선호하지만, 반대로 상대방이 나보다 먼저 와 있는 상황은 불편하다. 왠지 '내가 더 일찍 왔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지 싶다.
약속 시간 30분 전에 도착해 준비한 자료와 샘플을 점검하고 노트에 적은 내용을 다시 훑으며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을 무렵, 약속 시간에 정확히 맞춰 두 사람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여성 대표님 혼자 나오실 거란 내 예상과 달리, 남성분 한 분이 함께 나왔다. 대화 도중 알게 된 사실이지만, 두 분은 오랜 기간 교제해 온 커플이었다.
간단한 자기소개와 요즘 어떠냐는 둥 저쩌냐는 둥, 어색함을 깨지 못한 어설픈 대화를 조금 나눈 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내가 이 일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어떠한지, 또 어떤 마음으로 연락을 드렸는지를 상세히 전했다. 이어 구체적인 업무에 관련된 작업 프로세스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작업 프로세스를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먼저 샘플을 의뢰받거나 우리가 제안한다. 제작된 샘플을 판단한 후 샘플 확정(컨펌)이나 수정(재샘), 혹은 중단(드랍)의 결정 과정을 거친다. 이 단계가 확정되면 본 생산(메인 발주)에 들어가고, 출고 후 결제가 이루어지는 순서다.
보통 프로모션 업체들은 샘플비를 별도로 청구하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W 업체의 기존 두 품목을 제작해 준 업체 또한 샘플 비용을 청구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는 절대 그 비용을 요구하지 않는다.
'시작부터 돈을 요구하는 게 과연 옳은 순서일까? 스스로 비용을 투자하지 않으면서 프로모션 업무를 자처하는 것이 맞을까?'
물론 우리처럼 장시간 손발을 맞춰 온 협력 공장을 갖추지 못한 업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간헐적으로 제작 대행을 맡는 업체 입장에서 공장 핸들링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비용 면에서도 샘플 제작을 위한 원단과 부자재를 구입해야 하지만, 그보다 샘플 작업지시서를 만들고 원단을 찾아서 공장에 의뢰한 후 만들어지는 일련의 과정에 쏟는 시간을 생각하면 비용을 청구하는 것이 계산상으로는 타당할지도 모른다.
다행히 W 업체를 염두에 두고 빠르게 제작해 간 체크 셔츠 샘플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핏을 조금 수정해 첫 상품을 진행하기로 했다. "야호!
업무 이야기가 정리된 후에는 옷에 관한 취향이나 요즘 업계의 근황 등을 나누며 자리를 마무리했지만, 말이 좋아 대화지…. 걱정했던 나의 특기, '두서없이 장황하게 늘어놓기'는 어김없이 발휘되고 말았고 1시간 정도로 예상했던 미팅은 결국 3시간이 지나서야 마무리되었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만은 "너무 신나!"를 외치며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