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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민수 May 19. 2020

딸이 친구와 싸웠다. 5살 딸이.

싸움 끝에 ‘기도’를 배우다


두 여자아이들의 스페이스 바 쟁탈전이 벌어졌다. 다섯 살 우리 딸 이현이와 아내 친구의 딸은 동갑내기다.


“탁”. “탁”. “탁”. “탁”.


둘은 컴퓨터 모니터 앞에 나란히 앉아서 어린이 영상을 보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둘은 말없이 번갈아가며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한 아이는 영상을 잠깐 정지를 해놓고 싶었고, 다른 아이는 멈추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졌다.


 나는 아이들에게 “이제 그만, 싸우면 안 보여줄 거야”라고 다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내 이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제법 오래간다 싶었던 평화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아이들은 아주 오랜만에 봐도 마치 매일 만났던 것처럼 금방 친해진다. 하지만 잘 놀다가도 싸우고, 또 돌아서면 언제 싸웠냐는 듯 다시 서로를 찾으며 논다. 그 나이의 아이들만의 귀여운 특징이리라. 아이들이 함께 잘 노는 덕분에 주말 오후에 모처럼 모인 아내의 친구들은 마음 편히 식사하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저 가끔 일어나는 분쟁(?)을 살짝 중재만 해주면 되었다. 특히 영상을 볼 때는 말소리도 안 들릴 정도로 평화로웠다. 서로 스페이스 바를 눌러서 그 평화를 정지시키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우는 이현이를 다른 방으로 불러냈다. 울음을 달래며 왜 울었는지 물었다.


그런데, 이현이는 친구와 ‘스페이스 바 쟁탈전’을 벌인 것 때문에 운 것이 아니었다.

이현이는 아빠가 갑자기 소리를 지른 것에 놀라서 울었다고 했다. 내가 과하게 소리를 질렀던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는 그렇게 제지당했던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아 놀랐던 모양이다. 나는 소리를 질러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이윽고 울음이 잦아들고, 나는 아빠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설명하고 싶었다.


“아빠는 이현이가 친구랑 사이좋게 놀라고 영상을 틀어준 거야. 그런데 아까처럼 친구와 다투게 되면 못 보겠지?”


이어서 친구랑 같이 영상을 보면서 지켜야 할 예의에 대해서 얘기해줬다.

“혼자 볼 때는 마음대로 멈춰도 되겠지만, 친구들이랑 같이 볼 때는 먼저 양해를 구해야 해. “친구야, 나 지금 어디 다녀와야 하는데 잠깐 멈춰놓고 기다려줄 수 있어?”라고. 친구가 “그래, 그러자” 하고 받아들여야 멈출 수 있는 거야. 그래야 싸우지 않을 수 있어.”


 그랬더니 이현이는 조금 생각하다가

“그래도 싸울 수 있어!”

라고 받아치는 게 아니겠는가? 잠시 당황했으나 내가 다시 생각해봐도 이현이 말이 맞았다. 아빠의 말처럼 친구에게 잘 얘기해도 싸우게 될 수 있다. 친구가 안 받아들이면 그만이지 않나?


“이현이 말이 맞아. 그래도 싸울 수 있어. 안 싸울 수도 있고. 그런데 아빠가 말하는 대로 안 하고 친구에게 말도 없이 갑자기 멈추면 무조건 싸우게 되는 거야.”

이현이는 또 생각하더니

“그래도 싸울 수 있어!”

라고 했다. 그래, 이번에도 네 말이 맞다. 다섯 살 친구들 사이에서 그 정도의 예의를 기대하기는 힘든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래도 이현이는 안 싸울 수 있게 말해야 해. 만약 친구가 이현이의 말을 계속 안 들으면 아빠나 다른 어른한테 얘기하면 돼.”


이렇게 말을 마치는 순간이었다.


그 때 문득, ‘기도’가 떠올랐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할 기도가 이와 같지 않은가? 시편에 나오는 의인의 모습이 기억났다.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순종하는 자이지만, 동시에 그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그는 그 어려움을 세상에 대한 타협이나 동조로 해결하지 않는다. 경솔한 복수로 해결하지도 않는다. 그는 하나님께 그의 어려운 사정을 아뢰고 하나님이 나서서 해결해주시기를 기도한다.


내가 이현이에게 기대하는 마음을 생각해보니 하나님도 나에게 어떤 것을 기대하시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이현이에게 바라고 기대하는 모습은 이현이가 친구들에게 예의를 갖추어 말하는 것이다. (친구들은 안 그럴지라도) 무엇보다도 친구와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아빠로서 이현이가 겪을 수 있는 어려움을 충분히 예상하고 이해해줄 수 있었다. 만약에 이현이 혼자서 해보다가 안되면 아빠를 비롯한 어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부모 된 내가 마음을 이해해주고 위로해줄 것이다. 친구와 다시 사이좋게 지내도록 도와줄 것이다.


어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어떻게 보면 ‘고자질’ 혹은 ‘일러바치기’를 장려하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 않다. ‘고자질’은 무슨 일만 생기면 바로 쪼르르 달려와서 어른에게 해결을 요청하는 것이다. 배운 것을 가지고 스스로 최선을 다해본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고자질이 안 좋은 것이다.


이와 달리, 배운 것을 실천해보다가 어려울 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장려할만한 것이다. 오히려 옳은 것을 따르기를 포기해버리거나 혹은 옳지 않은 원칙과 타협을 하는 것이 더욱 나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스스로 복수하기 위해 친구를 때리거나 서로 상처를 입는 상황으로 번지는 것은 최악이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이와 같은 마음이시지 않을까.

친절하게 말해라. 싸우지 말고. 그래도 어려우면 나한테 이야기하렴. 내가 도와줄게.


부모가 되면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더 알 수 있게 된다고 하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요즘에서야 이해가 간다. 예전엔 상상으로만 이해했다면 이제는 이런 일들을 겪으며 정말로 체감하고 있다. 앞으로도 아이가 커가면서 더 많은 일들을 통해 나도 더 알아가겠지.


이현이는 내 말을 다 듣고는 이제 자기를 바닥에 내려놓아달라고 했다. 친구에게 다시 잘 얘기하러 가려나보다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놀고 싸우고 우느라 피곤했는지 바닥에 눕더니 자겠다고 한다. 그리곤 금세 잠들었다. 그래. 잘 자고 잘 커라 이현아. 아빠도 잘 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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