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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하 Aug 09. 2021

유리잔이 부서져내린다.

210809 19:30 뮤지컬 '실비아, 살다' 리딩공연 후기

*이 글은 본 리딩공연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공연이 올라올 때 까지 신경쓰이시는 분은 열람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생이란 무릇 아름답지만은 않을 것이리라.


뮤지컬 '실비아, 살다' 리딩 공연은 어린 소녀 실비아가 부모님 손에 이끌려 기차를 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기차의 종착역은 '아홉 번째' 마을이고, 그 중간에는 절대 내릴 수 없다. 내리려고 하는 자가 간혹 발생하는데, 그 때 마다 역무원의 손에 이끌려 되돌아온다. 그 안에서 실비아는 푸른 눈의 여인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내리는 방법으로, 비상 하차를 누르고 기차에서 처음으로 뛰쳐나간다.



이 뮤지컬은 실존 인물 실비아 플라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렇기에 그 생애와 시를 다룸에 있어서 조심스러우나 때로는 과감하게, 때로는 섬세하게 그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먼저 나오는 어린 시절의 그의 가정은 불완전하고 곧 깨질 것 같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병으로 아프고 신경질적이 된 아버지와 그를 돌보는 어머니. 그의 시를, 글을 읽어주는 유일한 존재가 아버지였다. 이 아버지의 존재는 그가 성장해서까지 큰 영향을 미친다.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할 존재가 남편 테드. 테드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같이 그의 글을 읽어주고 지지해주는 대상이 된다. 정확히는 그런 대상으로 간주된다. 그 환상이 테드의 외도와 폭언으로 깨어지는 순간, 실비아는 자신이 산산조각 나는 것과 자신의 인생에서 아버지와 남편이 어떤 식으로 자신의 삶을, 자신의 목소리와 글을 억누르고 있었는지 깨닫고 그제서야 자유로이 글을 쓴다.



이 극에서 실비아는 빅토리아 루카스라는 친구를 만나게 된다. 이름에서 예상한 이도 있겠지만 이는 곧 실비아 자신이며, 실비아가 세상을 버린 미래 시점에서 온 자신이다. 실비아의 친구로 그 주변을 멤돌며, 그리고 기차 여행을 함께하며 과거의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준다. 이런 부분이 좋았던것이 결국 자신이 자신의 목소리에서 힘을 얻고 의지해 나간다는 점이었다. 마지막에 실비아가 다시 기차 여행을 할 수 있게 도와주고, '벨 자'를 완성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 역시 빅토리아, 결국 자신이라는 점도 좋았다.



극 중에서 기차 여행은 하나의 삶에 대한 비유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가사 중 10년마다 죽음으로 돌아가고 그 때 마다 부활한다고 하는데 그게 고양이 목숨처런 9번이라고 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생을 저버리려 한 것이 30세 즈음이고 그 때가 세번째 마을에서였다. 그렇기에 90년의 생, 9번째 마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여행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밀어넣은 여행이다. 가정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영역이나 삶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공동체이다. 그런 부분에서 삶이란 사실 얼마나 확률적인가. 그런 확률적 삶이 기차 여행을 시작하는 부분으로 표현된다고 생각하였다.



아버지와 남편 역할을 같은 배우가 한 것도 꼭 그 둘이 실비아의 삶에서 맡았던 역할이 같았다는것을 보여주는 장치같아서 좋았다. 본공연이 되고 배우가 지금보다 늘어나도 이 부부은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이었다.



넘버 구성이나 리프라이즈가 사용되는 것이 매력적이었는데  넘버들은 합창부분들이 굉장히 매력적이었고, 리프라이즈는 멜로디 사용이 같으면서도 다른 가사로 다른 순간에 차용되는 부분이 너무 재미있었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춘 왈츠와 테드와 추는 왈츠, 그리고 마지막 후반부에 변주되어 나오는 것이 비슷한 곡조로 리프라이즈되는게 좋았다. 전반적으로 넘버가 굉장히 매력적이라고 생각되었다.



미와 추를 결정하는 것은 어떤 영역이며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는 아름다워야만 하는가. 하지만 생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아니, 실은 아름답다고 규정하는 것 조차 누군가의 정의에 의해서이기에 가치중립적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 생을 그대로 옮겨놓는 예술은 의미가 없는가. 생의 모방이 예술이며 예술의 모방이 생이라면 그것이 누군가의 기준으로 추에 속한다 한들 의미없다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극은 상당히 자극적이었다. 그의 삶이 굴곡졌던 만큼 거칠었고, 다듬어지지 않았다고 느꼈다. 특히 상해에 대한 부분, 그 묘사나 설명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는 제작사의 충분한 사전 주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았다고 느낀 것은, 위의 이유 때문일 것이다. 삶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인데 그것이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거부되어야 하는가. 사실 리딩이기도 했지만 극 자체가 상당히 러프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거친 붓터치의 느낌이 개인적으로는 좋았기에...본공연이 올라온다면 좀 정제되어 올라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으면 하면서도 지금의 맹수같음을 어느정도는 유지하였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


이 극 속 실비아는 계단을 오르고 올라 다시 기차 여행을 하는 데 성공하며, '벨 자'를 완성한다. 결국 진공으로 닫혀있던 뒤집힌 유리잔 속을 빠져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이 극 속의 결말이라고, 숨통이 트이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실존 인물의 삶과 관계짓지 않고 생각했을 때, 극 중에서의 죽음은 한 페이즈(phase)의 단절이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종말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죽음의 미화라고까지는 생각되지 않았으며 부활로 나아가기 위해 잿더미로 산화하는 과정의 하나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결말에서 그것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했다. 재 속에서 끊임없이 날아오르는 불사조와 같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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