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EP08.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진한 연대에 대하여
딸들은 왜 '엄마'라는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나는 것일까.
나 역시 그 많은 딸들 중 한 명에 속한다. 엄마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30초도 채 되지 않아 눈물이 흐른다. 짠하고, 미안하고, 서글픈 이름, 엄마.
엄마는 강원도 둔내 가난한 농부의 2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당시 교육환경에서 여자가 고등교육을 받는 일은 흔치 않았고, 엄마 역시 장녀였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중학교만 겨우 졸업하고는 남동생의 대학 생활을 뒷바라지해야 했다. 제대로 된 연애라고는 해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나이가 찼고, 덜컥 선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
선 보는 날. 명확한 직업도 없이 한량처럼 살면서 선보는 날 오토바이를 타고 온 아빠. 엄마는 도대체 왜 그런 사람에게 끌린 걸까. 결혼식 당일 날, 집에서 식장으로 가려는데 비가 너무나 많이 와서 개천에 놓인 다리가 물에 잠길 뻔했다고 한다. 그래도 어떻게든 식을 올리는 데 성공했는데, 엄마는 지금 돌이켜보면 그게 결혼하지 말라는 신의 계시가 아니었을까, 하고 말씀하시며 쓰게 웃으셨다.
결혼하고 나서 1년이 지나도 아이를 갖지 못해 전전긍긍하다가 비로소 나를 가지게 되었다. 어렵게 가진 아이라서 그런지 몸이 너무나 허약해서 어릴 때 한약을 엄청 많이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만 해도 아빠는 드디어 택시기사라는 좋은 직업을 가지게 되어 지방 도시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5년 뒤 태어난 동생. 동생이 어릴 때만 해도 우리 집은 행복한 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가장 행복한 기억이 있다. 밤이 되면 우리는 아빠의 퇴근을 기다리며 캄캄한 마당을 뛰어놀기 시작한다. 그러면 엄마가 뚝배기에 계란찜을 해서 가지고 나오시고, 우리는 계란찜을 한 숟갈씩 얻어먹고는 다시 마당을 뛰어놀았다. 그러다 보면 아빠가 오고, 하루가 마무리된다. 가물가물해진 여러 기억들 중 그 캄캄한 밤만이 또렷하게 추억이 되어 남아 있다.
우리들이 커감에 따라 집안의 분위기는 조금씩 나빠지기 시작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빠에게 의처증이 있었던 것 같다. 엄마를 의심하는 것도 모자라서 폭력을 휘둘렀고, 다음 날 엄마는 집을 나갔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갑자기 사라진 엄마를 매일 놀이터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 오늘도 엄마가 오지 않는다. 오늘도 오지 않는다. 매일 일기를 썼다. 결국 어르고 달래는 큰엄마의 손에 붙들려 왔고, 엄마는 다시 우리를 위해 살기 시작했다.
아빠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심장을 감싸고 있는 근육이 수축되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 그래서 서울의 큰 병원에서 갈비뼈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았고,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을 하기 위해 시골로 이사를 했다. 학기 초 반장선거에서 부반장까지 되었던 나는 시골의 학교로 전학을 가야 했고, 그때부터 왕따의 지옥이 시작되었다. 아빠는 집에서 요양을 했지만, 동시에 다른 것도 한 것 같았다. 어느 날 들여다본 안방에는 모르는 아저씨들이 있었고, 초록색 테이블 위에는 트럼프 카드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나는 그때 어리기도 했고, 도박이 뭔지 몰랐기 때문에 사촌들이 명절날 모여 고스톱을 치고 노는 것 같은 건가 보다,라고 생각했지만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치가 떨리는 일이다.
택시기사로 벌이를 하던 아빠는 도박에 빠져 열심히 굴렸던 소나타 차마저 팔아버렸다. 개인택시 하나 가지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나는 훗날 어른이 돼서야 할게 되었다. 엄마와 아빠의 싸움은 잦아졌고,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집에는 가구가 하나도 없었다. 텅 비어 있었다. 소위 말하는 ‘빨간딱지’가 붙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사기까지 당했는지, 우체통에는 영문도 모를 청구서가 빼곡히 꽂히기 시작했다.
사기를 당한 후 부모님은 남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위장이혼을 했던 것 같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것이었지만, 의처증과 바람 등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을 것이다. 고등학생이었던 내게 엄마는 이혼을 통보하듯이 이야기했고, 그 순간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의 힘겨운 결혼생활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물론, 쉬운 마무리는 아니었다. 매달 들어와야 할 양육비는 들어오지 않았고, 대한민국 법은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부모에 대해 따로 처벌하거나 도와주지 않았다. 운전면허조차도 없이 그저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엄마는 닥치는 대로 뭐라도 하며 돈을 벌었다. 식당 서빙, 천냥샵 직원, 마트 야채 코너 등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혼자 힘으로 자식 둘을 4년제 대학교에 보내고 난 엄마는 어깨의 인대가 돌처럼 굳어지는 인대골화증을 얻고 말았다.
엄마의 피와 땀으로 꽤 괜찮은 국립 대학교에 들어간 나는 졸업과 동시에 취업에 성공했고, 그 뒤로 내가 근무하는 10년간은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했다고 하신다. 매일 시답잖은 일상에 대해 통화를 하고, 명절이 되면 다 같이 모여 웃으며 놀고. 그러나 내가 우울증을 통보하고 나서, 엄마의 인생은 다시금 불행에 빠져버렸다. 엄마는 내 퇴사 소식을 들으신 후 두 달여를 매일 우셨다고 한다. 우리를 위해 희생했던 나날들에 대해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미안하다고 하신다. 이렇게밖에 못 해줘서 미안하댄다. 도대체 왜 미안한 걸까. 엄마는 할 만큼 했고, 그 힘든 상황에서 부모로서의 도리를 다 하셨는데. 나는 엄마의 이런 자기희생적인 사고방식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엄마가 없었으면 나 또한 존재할 수 없었을 걸 알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사하다.
그리고 엄마의 찬란할 수 있었던 젊은 시절을 고스란히 녹여서 받은 만큼, 엄마의 말년을 조금이라도 행복하실 수 있게,
빨리 나아서.
보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