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fax Challenger League
태민이가 태어나기 전엔 내 인생 버킷 리스트의 상단에는 '아들과 같이 야구하기'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야구를 좋아했고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야구를 하고 있는 나인지라, 아들이 태어나면 캐치볼과 배팅을 가르쳐서 리틀리그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차근차근 성장시키고 싶었다.
꽤나 진지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몇 년간 내 카톡 상태창 메시지가 '신동좌완 김태민'일 정도로. 나는 20대 중반에야 야구를 시작했기에 어릴 때 야구를 시작한 사람들에 비해 손색이 있었지만, 아들은 어릴 때 시작하니 금방 배우고 쑥쑥 자라서 금세 나를 따라잡을 것이라 믿었다. 오른손잡이였지만 아버지가 왼손 투수로 키웠다는 류현진처럼 태민이를 특급 좌완으로 키워내고 싶기도 했다. 주말마다 벤치에 앉아서 다른 부모들과 함께 아들의 시합을 응원하고, 개인 레슨도 보내고, 비싼 비용과 고된 라이딩에 투덜대기도 하겠지. 아마 프로에 가는 건 힘들겠지만 그래도 아들이 스무 살일 때 난 고작 오십이니 현역으로 뛰기는 충분하니까. 같은 팀 멤버로 운동하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물론 이 모든 상상의 나래는 아이의 자폐 진단과 함께 비 맞은 밀가루처럼 흩어져 버렸다. 단체 운동인 야구에서 커뮤니케이션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데, 자폐로 인해 의사소통이 제한적인 아이가 코치 및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고 같이 운동하기는 매우 어려우니까. 게다가 타고난 몸치인 태민이는 간단한 운동 하나를 습득하는데도 보통 아이들의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야구를 하려면 기본적으로 스윙, 포구, 송구, 주루 등 다양한 기술이 필요한데 (지속적인 나와의 훈련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아직 글러브로 공을 움켜쥐는 것도 어려워하고 공도 기껏해야 3-4미터 던지는 게 전부다. 티볼, 리틀리그, 트래블 팀 등 미국에는 정말 다양한 옵션이 있지만 어느 것도 우리에게는 해당사항이 아니었다.
텍사스에서 버지니아로 이사하고 비자와 영주권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좀 정신을 차린 2022년 어느 날, 미국 야구팀의 친구에게 아이의 자폐 얘기를 꺼냈는데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위한 야구 리그가 있다"는 정말 뜻밖의 답변을 들었다. 운동장에 나갈 수만 있다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고. 그때만 해도 '설마 태민이가 되겠어?' 생각하며 흘려 들었는데, 올해 또 누군가에게서 비슷한 얘기를 듣고 나서 호기심에 구글링을 시작했다. 놀랍게도 내가 사는 Fairfax를 포함한 많은 county에서 diability가 있는 아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야구 리그를 운영하고 있었다. 2023년 가을은 9-10월 두 달간 일요일마다 게임이 있으며 참여비는 단돈 25불. 유니폼과 모자도 그냥 나눠준다니 사실상 공짜나 마찬가지라 한 번만 가도 손해는 아니겠다 싶어 얼른 등록했다.
9월 내내 주말에 비가 내려서 몇 번 경기가 취소된 끝에 드디어 어제 처음으로 경기에 갔다. 오후 1시에서 2시까지 진행되는 짧은 경기지만 많은 부모들이 벤치에 앉아 소리 높여 응원하는 열렬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선수의 나이대와 상태는 정말 다양하다. 거의 어른만 한 키와 덩치의 아이, 겨우 걷고 달리는 어린아이, mental disability (자폐, 다운증후군 등) 때문인지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 걷지 못해 휠체어를 타고 타석에 들어서는 아이 등등. 하지만 모든 선수가 타석에 들어서고 수비를 한다. 수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필드에서 아이들에게 붙어서 도움을 주지 않으면 게임이 제대로 진행되긴 어려우리라.
경기 진행은 일반적인 야구와 꽤나 다르다. 상대팀의 투수가 아닌 팀의 코치가 몇 미터 앞에서 공을 치기 쉽게 토스해 주며, 라인업의 모든 선수가 공을 한 번씩 치고 달리면 이닝이 종료된다. 제법 모양이 나오는 스윙을 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야구 규칙도 모르고 배트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그야말로 초보들이었다. 스윙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선수들에게는 타격 코치가 붙어서 어떻게든 공을 배트에 맞출 수 있게 해 주고, 어찌어찌 공을 맞춘 아이들은 신나서 1루로 (때로는 3루로) 열심히 달려 나갔다. 태민이는 그동안의 연습에도 불구하고 배팅은 그다지 잘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자기에게 굴러오는 공을 잡아서 1루 방향으로 던지기는 했다. 아, 지난 2년간의 캐치볼이 마냥 헛고생은 아니었구나.
태민이의 난생 첫 야구 시합. 규칙도 모르고 왜 내가 여기 있는지도 모르겠는지 꽤나 짜증을 심하게 부렸지만 적응되면 좋아지겠지. 무엇보다 실력과 몸 상태에 상관없이 따뜻하게 맞아주고 상대 팀에게도 응원을 보내는 이 리그의 분위기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남은 몇 주간은 열심히 나가서 아이가 야구를 경험하고 즐기도록 도와주려 한다. 그저 이런 기회가 있는 이 나라와 지역 사회에 감사, 또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