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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Kim Sep 15. 2023

"(여행) 끝났어"

드디어 WH question에 봄이 오는가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해서 기쁜 것도 잠시, 대부분의 부모들은 곧 이어지는 질문의 홍수에 진저리를 치게 된다. 저 아줌마 누구야 (Who)? 언제 유튜브 볼 수 있어 (When)? 여기 어디야 (Where)? 저게 뭐야 (What)? 왜 목욕해야 돼 (Why)?...끝 없이 이어지고 바닥 없이 파고드는 질문들에 질려서 부모들은 종종 자제심을 잃고 "나도 몰라! 그만 좀 물어!" 소리치는 경우도 있다.


아쉽게도 우리 부부에게는 해당사항이 아니었다. 자폐로 인해 아들 태민이는 발화부터 늦었고, 타인 (특히 또래)들과 공감하거나 어울리려는 욕구 자체가 많이 없다 보니 주로 혼자 노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궁금한 것도 별로 없고, 설령 어떤 것이 궁금하더라도 이걸 어떻게 타인에게 물어봐야 하는지 방법을 모르는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때때로 질문의 홍수에 시달리는 부모들을 보면 오히려 부럽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요새는 그래도 제법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혹은 뭘 생각하는지 재잘재잘 많이 이야기하긴 하는데, 여전히 질문을 던지거나 질문에 대답하는 부분은 큰 변화가 없다. 좋은지 싫은지 (Do you like/dislike...?) 혹은 A/B 중 무엇을 더 원하는지 (Do you want A more or B more?) 등 간단한 질문에는 제법 잘 답하지만, 더 복잡한 질문, 흔히 영어로 WH questions (WHo, WHen, WHere, WHat, WHy)이라 부르는 추상적인 질문은 여전히 아이에겐 큰 벽이다. 벌써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젠 WH question이다' 마음먹고 언어치료사 및 학교 특수교사와 함께 집중 공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진도가 느린데, 훨씬 어린 아이들도 잘 하는 것들을 이리 어렵게 배워나가는 걸 보면 (이게 자폐아동의 특징임을 알더라도)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조그마한 변화와 발전을 발견하는 날에는 짜릿한 기쁨과 감동을 느끼게 된다. 어젯밤, 실내 야구 연습장에서 받은 와이프의 카톡. 


    태민이가 지도에 붙어있는 LA 여행 포스트잇을 떼더라고

    그래서 내가 "너 뭐 해?" 그랬더니

    "쓰레기 버렸어" 이러는 거야.

    그래서 내가 "왜 버렸어?" 물어보니

    "끝났어 (여행 끝났어)" 


아이 방의 벽에는 아래 사진과 같은 지도가 붙어 있고, 여행이 계획되면 우리는 조그만 포스트잇에 날짜와 여행할 도시 정보를 적어서 붙여 놓는다. '언제' 여행을 가고 '어디로' 여행을 가는지 시각적인 정보를 전달하여 아이가 그런 추상적인 개념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작년부터 여행을 다녀온 후 아이가 해당 포스트잇을 떼서 어딘가 버리곤 했는데, 어젯밤에는 아이가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what), 무엇보다 처음으로 '왜 그랬는지' (Why)에 대해 제대로 된 대답을, "여행이 끝났기 때문에 버려요" 라고 한 것이다! 


아, 드디어 뭐가 뭔지 알아챘구나. WH question에도 봄이 오긴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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