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태민이
드럼 너머로 보인 미래의 그림자
태민이가 중학생이 된 뒤로 자리 잡은 루틴이 있다. 오후 3시에 스쿨버스에서 내려 집에 온 뒤 간식을 먹고 나서 내 감독 하에 드럼 연습과 운동을 하는 것. 어제도 원래는 그렇게 흘러가야 했지만 아직 나는 일이 덜 끝난 상태였다. 그래서 노트북을 펴놓고 간식을 식탁에 차려 놓은 후 태민이에게 “오늘은 그냥 좀 놀고 있어”라고 말했다. 배가 차면 만화도 좀 보고 장난감도 가지고 놀며 알아서 시간을 보내겠지 싶었으니까.
일에 몰두하고 있는데, 위층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쿵, 쿵, 따다다다.’
아, 드럼 건드리기 시작했구나. 심심해서 그냥 두들기는 정도겠거니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소리가 오래 이어진다. 5분? 10분? 처음에는 저러다 말겠지 했는데 어느 순간 ‘어? 저걸 아직도 하고 있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증이 귀찮음을 이기고 뭘 저렇게 하나 가보려던 찰나 계단에서 내려오던 태민이와 마주쳤다.
그는 두 손을 들더니, 손뼉을 짝짝짝 치면서 말했다. “Awesome job!”
아, 저건 내가 평소에 태민이가 드럼 연습을 잘 마쳤을 때 해주던 말이다. “오늘 연습 진짜 잘했어. Awesome job!” 이때마다 태민이는 해맑은 웃음을 짓곤 했는데, 어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본인이 알아서 드럼 연습을 마치고 자기 자신에게 칭찬을 해 주고 있었다.
나와 와이프의 고민은 다른 집 부모들의 그것과는 결이 많이 다르다. “어느 대학을 보낼까?” “의대가 좋을까, 공대가 좋을까?” 이런 고민을 할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하련만, 우리의 고민은 “이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혼자 살아갈 수 있을까?”에 더 가깝다. 청소부든 마트의 계산원이든 사람들 사이에서 규칙적으로 일을 하고, 적은 돈이라도 벌어 자기 씀씀이를 감당할 수 있다면 그 이상 바랄 게 없다.
하지만 자폐가 있는 아이에겐 이런 당연해 보이는 모습조차 결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주변 사례를 보아도 성인이 된 뒤에 꾸준히 일을 하는 친구는 열에 하나, 스물에 하나 있을까 말까다. 커뮤니케이션과 인간관계가 가장 큰 벽이고, 설령 지능이 높아서 대학 졸업장을 받는다 해도 그에 걸맞은 직업을 구하는 건 또 완전히 다른 문제다. 자폐를 가진 자녀가 이 동네 명문인 University of Virginia를 졸업했음에도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쉬고 있다는 류의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면 남의 집 일인데도 마음 한편이 서늘해진다. 학위가 있어도 저 정도면 우리 태민이는 어쩌나...
“꿈은 크게 가지라”는 말처럼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 알아서 척척척!'이라는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있어도, 막상 '어디서부터, 어떻게 가르쳐야 하지?' 하는 질문이 마음에서 떠오르면 답이 궁해진다. 직업에 필요한 기술도, 타인과의 소통도 자폐를 가진 아이가 홀로 터득하긴 어려우며 누군가가 먼저 틀을 잡아주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가 이끄는 방향대로 나가다 보면 아이가 자주적으로 자신의 일을 해 나가게 될 것이라는 증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제, 그 짧은 순간이 나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왔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해야 할 일을 스스로 떠올리고,
그걸 실제로 실행하고,
끝난 뒤에는 스스로를 칭찬까지 하는 아이.
손뼉을 치면서 “Awesome job!”이라고 말하던 그 모습.
여전히 앞은 캄캄하고
우리의 여정이 얼마나 길지 가늠하긴 어렵지만
조심스레 비쳐온 미세한 서광에 의지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