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oky Mountain 여행기
우리 부부 둘 다 휴가가 넉넉하지 않기도 하고 사는게 바쁘다 보니 '언젠간 꼭 가야지' 별러왔던 Smoky Mountain 여행을 11월에야 잡을 수 있었다. Smoky Mountain 국립공원은 가을이 되면 단풍구경을 위해 전국에서 몰려오는 유명 관광지이며, 단풍의 절정인 9월 말부터 10월말까지는 발디딜 틈 없이 관광객으로 붐빈다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큰 기대 없이 여행을 시작했는데, “이젠 단풍 다 져서 앙상한 언덕만 보고 오겠지" 하는 반쯤 체념한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음으로, 가족과 함께 가을의 끝자락이나마 붙잡는 것에도 의미가 있겠지 생각했을 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여행은 늦가을이 초겨울에게 자리를 살짝 내어주며 인사를 건네는 그 짧은 순간을 딱 잡아낼 수 있었던 운이 좋은 여행이었다.
여러 사이트에서 경고한 것 처럼, 직접 겪어 보니 이 동네들의 교통체증은 생각 이상이었다. 11월임에도 적지 않은 관광객들이 주말을 즐기고 있었고, 왕복 4차선 도로가 한 번 막히기 시작하면 빠질 곳도 마땅치 않으니 마냥 앞 차가 빠지길 기다릴 수밖에 없더라. 피크 시즌이 아니어도 이 정도라니 성수기에는 과연 어느 정도일지... 그래도 맛있는 식사 후 오밀조밀 잘 꾸며져 있는 동네 골목들을 즐기다 보면 긴 운전으로 지쳐있던 얼굴에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Roaring Fork Motor Nature Trail은 Smoky Mountain 국립공원에 있는, 차를 천천히 몰며 풍경을 감상하는 드라이브 코스다. 나름 단풍으로 유명한 Shenandoah 국립공원 근처에 살다 보니 솔직히 마음속 어딘가엔 “여기도 단풍으로 유명하다고는 하지만, 뭐 우리 동네랑 크게 다르겠어?" 하는 약간의 자만심 비스름한 것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색색의 단풍이 겹겹이 쌓인 너머로 웅장한 능선이 자태를 뽐내자 나의 자만은 조용히 사그라 들었다.
“아, 여기가 괜히 전국 단풍 맛집이 아니구나...”
드라이브 코스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는 작은 기념품샵이 하나 있다. 화장실도 갈 겸 들렀는데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결국 흑곰 한 마리를 우리 집 둘째로 업어오게 되었다. 일과를 마치고 현관문 앞에 설 때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데, 아직도 그에게서 Smoky Mountain의 향기가 묻어나는 느낌에 괜스레 웃음 짓게 된다.
드넓은 국립공원을 구석구석 보려면 1주일도 모자라겠지만, 시간이 많지 않은 우리는 유명한 곳 몇 군데만 선택적으로 다닐 수밖에 없다. Clingmans Dome과 Cades Cove Loop 두 지역을 돌아보았는데 고도에 따라 계절이 달라지는 풍경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산 꼭대기 전망대 근처로 올라가면 나무들은 이미 잎을 대부분 떨군 채 앙상하게 서 있고 바람도 차갑게 불어 “아, 여긴 이미 겨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30-40분만 차를 몰고 내려와도 노란색과 주황색이 풍성한 숲과 산책로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초겨울과 늦가을을 번갈아 걸어 다닌 기분이랄까. 사진을 아무리 찍어도 그 분위기가 잘 담기지 않는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사실 Chimney Rock State Park는 “가는 길에 있으니 한 번 들러볼까?” 정도 기대치였다. 국립공원처럼 이름값이 높은 곳도 아니고. 하지만 내 기준으로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을 뽑으라면 단연코 이곳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Chimney Rock의 정상까지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잠시 숨이 멎는 느낌이 들었다. 색색의 단풍으로 뒤덮인 언덕과 그 사이를 흐르는 강물이 한눈에 담기는데, 이 아름다움을 대체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날따라 바람이 정말 많이 불어서 계획했던 고산지 하이킹은 포기해야 했지만, 그 대신 공원의 상징인 Hickory Falls를 보러 가는 트레일을 걸었다.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길, 나무 사이로 떨어지는 물소리, 적당히 차가운 공기까지 어우러져서 굳이 높이 올라가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계획했던 여행지는 North Carolina Arboretum 그리고 Grandfather Mountain이었다.
갑작스러운 한파로 오래 머물지는 못했지만, 주차료 20달러만 내면 된다는 게 송구할 정도로 식물원의 구성은 굉장히 알찼다. 넓게 펼쳐진 정원과 산책로, 테마별로 구성된 구역들이 잘 정돈되어 있었고 밤에 오면 알록달록한 전구 장식이 꽤 볼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분재 특별관이 꽤나 인상적이었는데, 다양한 형태와 나이를 가진 분재들이 정갈하게 자신의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있자니 돌보는 이의 정성과 세월이 빚어낸 아름다움, 뭐라 설명하기 힘든 묵직함이 느껴졌다.
전날부터 시작된 추위는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고, 다음날 아침 한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Grandfather Mountain 공원 입구에는 '공원 폐쇄'를 알리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풍광이 기가 막히다는 글을 보고 찾아왔기에 너무나 아쉬웠지만, 영하 10도에 달하는 기온과 얼어붙은 접근로를 생각하니 입맛을 다시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절정의 화려함은 이미 지나갔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닌 애매한 시기. 어쩌면 그래서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완벽하게 예쁜 풍경 대신 조금은 비어 있고 다음 계절에 자리를 양보하는 순간을 조용히 지켜본 느낌이었으니까. 붐비는 도로에 갇히고, 비싼 주차비에 얼굴을 찌푸리고, 악천후에 일부 계획은 수정하거나 포기해야 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이번 가을 여행은 오래도록 우리 가족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렇게 또 한 계절이 지나가고, 우리의 시간도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