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한국 방문은 다른 해보다 유달리 이른 1-2월이었다. 춥고 미세먼지 많은 겨울은 한국 방문에 좋은 시기가 아니기도 하고, 연초부터 2-3주짜리 휴가를 쓰는 건 아무리 미국 회사라도 눈치가 좀 보이는 일이지만 처가 쪽 가족행사에 꼭 참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휴가를 박박 긁으면 1월 말인 내 생일과 구정을 모두 부모님과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것도 나에게는 큰 의미였다.
재미있게도 귀국길과 출국길 모두 다른 나라를 짧게 들르게 되었다.
난생처음 들르는 프랑스 파리, 20년 만에 가보는 일본 도쿄
만료를 앞둔 항공사 포인트를 털기 위해 평소처럼 샌프란시스코나 LA를 거치지 않고 동쪽으로 돌아서 파리를 들러서 서울로 가는 비행기를 예매했다. 파리에서 6시간 레이오버가 있었는데, 문득 ‘어차피 환승이니까’라는 생각이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오냐’로 바뀌었다. 라운지에서 지루하게 시간을 죽이느니 잠깐이라도 도시를 즐기고 오고 싶었다.
하지만 처음 가보는 도시에서의 6시간은 결코 충분한 시간이 아니다. 또한 비행기 도착 지연, 처음 타보는 파리 대중교통, 소매치기 등 많은 변수가 존재했기에 여행을 계획하면서 무수한 검색과 인공지능과의 문답을 거치면서도 '이게 진짜 맞나?'라는 자문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단 하나의 이슈가 발생해도 자칫하면 한국행 연결 편을 놓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고, 그랬다가는 귀국일이자 내 생일을 부모님과 식사하며 보내겠다는 계획이 완전히 망가지는 거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빠릿빠릿 다닌 덕분에 보고 싶은 건 다 보고 무사히 돌아왔다. 물론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했고 카페에서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 했지만, 이동시간을 빼면 고작 1시간 반~2시간쯤의 짧은 관광이었음에도 그 기억들은 행복으로 충만하게 차 있다.
07:40 랜딩 (08:15 예정이었는데 일찍 도착)
08:30 공항철도 탑승 후 출발
09:30 노트르담 성당 도착 + 내부 관람
10:00~11:00 도보 이동: 생트샤펠 → 퐁뇌프 → 루브르(외곽) → 오벨리스크 → 에펠탑
12:50 공항철도 타고 출발 게이트 도착
이게 가능했던 건 걸음 빠른 나 혼자 배낭만 매고 움직인 탓도 있지만, 비수기인 1월이라 공항도 관광지도 한산했고 파리 도착도 예상보다 빨랐던 점이 큰 도움이 되었다.
중학교 때 대항해시대 3을 하면서 꼭 가보고 싶었던 노트르담 성당의 아름다운 외관과 섬세한 내부 장식, 에펠탑까지 걸어가며 느낀 파리의 정취. 그날따라 안개가 짙어서 에펠탑은 절반밖에 안 보였지만, 그래도 내 눈으로 보고 왔기에 후회는 없다.
지난 22년 겨울, 인생 첫 경험이었던 ANA 1등석은 꿈만 같았다.
문이 닫히는 나만의 공간, 환상적인 음식과 위스키, 정갈한 서비스.
10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도 피곤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하지만 마일리지로 티켓을 구하는 난이도가 워낙 높으니 이런 호사는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귀국 예정 일자에 일본발 시카고행 1등석 마일리지 티켓이 풀려서 얼른 예약을 했고, 시카고행 비행이 오전시간이었기에 당일 새벽 일본 이동은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여 부득이 귀국 전날 오후에 도쿄에서 1박을 하기로 했다.
귀국 전날: 나리타 공항 도착 (오후 8시쯤) => 아사쿠사역으로 이동해서 숙박
귀국일: 오전 6시에 기상하여 아사쿠사 센소지 구경 후 7시경 하네다 공항으로 출발
별로 어려울 것도 없어 보이는 여정이었고, 실제로 일본 입국까지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역무원이 안내한 대로 탑승한 열차가 알고 보니 다른 역으로 가는 지정좌석제 고속철도였다는 걸 깨달은 순간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가방 두 개와 면세품 쇼핑백을 낑낑대며 나르고 지쳐서 앉아 있는데 다른 사람이 '여기 제 자리인데요' 했을 때의 그 황망함이란...
당황한 채로 일어나 역무원을 찾아 도움을 요청했더니 '응 님 잘못 탔음. 추가 요금도 내셔야 함'이라는 설명을 들어야 했다. 1,600엔이 큰돈은 아니지만 그 상황에선 삥 뜯기는 기분일 수밖에. 우중충한 기분으로 종점에서 내려 무거운 짐 가방 2개 + 면세품 쇼핑백을 끌고 목적지행 지하철을 갈아타고, 간신히 아사쿠사 역에 도착해서 수십 개의 계단을 올라가는데, 두 팔은 부들거리고 도쿄의 쌀쌀한 밤공기 아래에서도 구슬땀이 흘러내렸다. 난 왜 이 고생을 사서 하고 있는 건가...
분명 1등석은 체크인에서부터 착륙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지만, 나중에 2026년 한국 여행을 돌아본다면 1등석의 편안함과 기가 막힌 음식&주류도 아닌, 아름답던 아사쿠사 센소지 야경도 아닌 바로 이 고생스런 순간을 떠올릴 것 같다.
역무원 안내를 철석같이 믿고 다른 열차를 타버린 순간,
티켓에 좌석 번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당황감
1,600엔에 치밀어 오르던 짜증
아사쿠사역 계단 중간에서 얼얼한 손을 비비며 내쉬던 한숨 같은 것들
돌아보면 다 추억이라고, 나중엔 이 순간들도 웃음으로 추억하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