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연극,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재수 끝에 들어간 대학은 생각보다 즐겁지 않았다. 한 학기도 안 되어 어느샌가 반복되는 일상에 살짝 지루해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때, 연극 동아리 홍보 포스터에 적혀 있던 이 단순한 (약간 유치하기까지 한) 한 줄의 문장이 나의 20대 초반을 연극과 함께 하게 만들었다. 첫 무대에 섰던 것이 벌써 17년 전이지만, 아직도 조명을 향해 걸어나가던 순간 온 몸에 퍼지던 전율이 기억난다.
관객 입장에서는 어딘가 어설프고 아쉬울 수 있는 아마추어 연극이지만 이를 만드는 데는 생각보다 굉장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이번 글에서는 어떤 과정을 통해 한 편의 연극이 만들어지는지 독자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한다.
가장 먼저 극의 제작자인 연출과 기획이 모여 다양한 대본을 검토한 후, 공연하고 싶은 작품을 결정하고 연습에 필요한 인력, 시간, 장소 등에 대한 개략적인 그림을 그려야 한다. 작품 선택은 사회 분위기, 극본의 내용, 흥행성 등 다양한 기준에 따라 이루어진다.
기획은 배우 및 스태프의 섭외, 공연 일정 관리, 펀딩, 홍보 자료 제작 및 배포, 공연장 확보 등 극 전반을 총괄하여 담당하는 중책 중의 중책이다. 배우-연출-스태프 간 갈등이 발생할 때 이것이 크게 번지지 않도록 총괄자로서 조절하는 것도 필수 덕목이다. 힘든 일은 도맡아 하면서도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 잘하면 티가 안 나지만 못하면 공연 전체가 힘들어지는 점 등 여러모로 가정 내의 어머니 역할과 많이 비슷하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공연 포스터에서는 기획의 이름을 제일 앞에 (심지어 연출 보다도 앞에!) 놓는다.
연출의 임무는 기획이 만들어 놓은 전장에서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총 동원하여 공연을 빚어 나가는 것이다. 대본의 해석, 배우들의 연기 모니터링 및 조언, 각 장면의 전체적인 모양, 등장 인물간의 호흡 등을 조절하는 연출의 역량에 따라 동일한 대본과 동일한 배우로 올린 연극이 다시 보고 싶은 명작이 될 수도 있고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졸작이 될 수도 있다. 공연을 보며 '배우들 연기도 좋고 극본도 좋은데 뭔가 좀...' 싶으면 십중팔구 연출이 극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고 보면 된다.
본격적인 공연의 제작에 앞서 인원을 섭외하고 서로의 친밀도를 높이는 (ice-breaking) 기간이다. 연출과 기획은 섭외된 배우들과 최소한 주 1~2회씩 모여 선정한 대본을 읽고 이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도록 하여 극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의견 차이를 조정해 나간다. 이 시기에 배우들이 충분히 친해지지 못하면 나중에 난이도 있는 장면을 만드는데 (i.e. 19금, 폭력적인 장면 등)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연출의 지도로 각 장면의 완성도를 높이는 기간이다. 최소한 주 3~4회, 회당 2~3시간씩 다 같이 모여서 연습해야 하며, 특정 배우의 연기가 늘지 않거나 특정 장면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경우 추가적인 연습이 필요할 수도 있다.
또한, 연극에 대한 경험이 없는 배우들의 신체를 단련하는 과정도 빼놓을 수 없다. 공연장에 있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의 관객이 만들어내는 소음이 대사의 전달을 방해하기 때문에, 일상적인 대화를 무대 위에서 할 경우 공연장의 뒤쪽에 앉은 관객들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든 장면에서 억지로 큰 소리를 낼 수도 없는 일이다. “또렷하면서도 객석 끝까지 들리는 힘 있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몇 주에서 몇 달간 발성 (복부에 힘을 주어 공기를 강하게 밀어내는 목소리 내기)을 지속적으로 연습해야 한다. 또한, 무대 위에서의 모든 움직임-걸음걸이, 손동작, 제스처 등 또한 일상의 것들과 크게 다르기에, 연습을 통해 몸이 연기와 무대에 적응하게 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미친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필자의 경우 무대 위에서 두 팔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첫 공연 준비 내내 고민거리였다. 연기가 일상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 무슨 이야기인지 그 때 제대로 깨달았던 것 같다.
모든 공연 관계자에게 가장 체력적·정신적인 부담이 큰 시기이다. 공연 연습과 더불어 무대 제작, 소품 및 음향 준비, 조명 세팅, 공연 홍보물 배포 등을 동시에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연 2~3일 전부터는 본격적인 리허설에 들어간다. 모든 관계자가 모여서 관객만 없는 상태로 공연을 진행하는 것이다. 의외로 이 시점에서 미진한 부분들이 많이 발견된다. 소품이 모자라거나, 배우들의 동선이 꼬이거나, 연습 당시에는 잘 나오던 대사가 조명 아래에서 갑자기 막히거나…. 어떤 공연이든 다 생기는 일이니 그냥 하던 대로 연습하는 방법밖에 없다.
칠흑 같은 어둠, 입장하는 관객들의 웅성거림과 발소리, 긴장한 동료 배우들의 침 삼키는 소리, 공연 소개와 박수에 이어 들어오는 조명의 전기음, 조명을 향해 걸어 들어갈 때 온몸을 내달리는 아드레날린…. 어떤 공연이든, 관객이 많든 적든 간에 무대에 오른다는 것은 배우에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이다. 굳이 조언 한마디 한다면, 실전은 연습처럼 하라고 했다. 관객이 있다고 흥분하거나 억지로 힘을 더 주어 연기한 경우 별로 좋은 느낌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공연 이후의 마무리도 공연 준비 못지않게 중요하다. 무대 정리와 당일의 뒤풀이를 통해 공연 준비기간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와 서로 간의 얽힌 감정을 푸는 것은 앞으로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또한, 공연의 흥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1~2주 후에 모여 공연 전반에 대한 평가회를 개최하여 공과를 밝히고 더 나은 공연을 위해 개선되어야 할 점이 무엇인지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은 이후의 공연을 위한 귀중한 자료가 된다.
위와 같이 제작 과정을 알게 되고, 공연을 보면서 ‘나도 한 번 해보고 싶은데….’ 혹은 ‘내가 연출이라면 더 잘 만들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용기 내어 한번 시작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단언컨대 걱정하는 만큼 어렵지는 않으며, 공연을 통해 느끼는 보람은 기대보다 훨씬 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