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로그에서 건져 올린 2017년 1월의 글
그의 책방은 숨겨져 있다. 애초에 장사 목적이 아니라는 거다. 그의 집엔 개인적 공간이 없다. 그가 혼자 샤워하고 잠을 청하는 그곳은 동시에 모두에게 오픈되어 있는, 공용 스페이스다. 가장 프라이버시를 추구해야 할 직업인이 가장 오픈된 공간을 제공한다. 그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정말, 행복해 보인다.
스무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각기 혼자, 동반자 없이. 세계 영화 어워즈 후보 6관왕에 오른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몇몇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시사 후 책방에 모여 간단한 소회를 하고, 사람들의 아쉬워하는 눈빛을 본 그는 위로 올라가자고 한다. 그의 개인적 스페이스로.
사람들이 모여 앉았다. "다양한 분들을 모시려고 했다"는 그의 말처럼 정말 전부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왔다. 교사, 간호사, 트레이너, 쇼호스트, 주부, 백수, 방송인, 마케터, 비서, 그리고 대학생. 트레이너는 요리에도 관심이 많아 한식, 중식, 양식 요리사 자격증이 있다고 하며 노홍철에게 직접 만든 과일 주스를 건넸다. 간호사 여자는 편의상 간호사라고 썼지만, (병원에서 약품을 정리한다는 말로 유추한 건데) 나중에 이야길 해 보니 "저 간호사 아니에요 ㅎㅎ"라고 했다. 주부는 나중에 헌책방을 운영하고자 하는 꿈이 있다고 한다. 모두가 접점이 없어 보이지만 <철든 책방>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하는 이곳을 찾아온 만큼, 책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었다. 영화와 책 이야기가 끝난 후 본인 소개와 질문을 나눴다. 그중 기억나는 질문.
저는 여태껏 정말로 겁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제가 하고 싶은 거, 궁금한 거 다 해보며 살았어요. 근데 이제 결혼 적령기가 되고... 점점 그런 행동을 못 하겠어요. 그래서 묻고 싶은 게, 어떻게 이렇게 본인이 그린 그림을 실현하면서 사시나요?
이에 대한 그의 답.
그냥 하세요. 정말, 저도 '그냥 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미쳤다고 하죠. <무한도전> 하나 하면 탄탄대로에, 돈은 돈대로 착착 들어오고. 이러고 몇 개월 벌 거 TV 프로그램에서는 하루 만에 주니까요. 누구는 '미성숙'하다고 하고, 다른 누구는 '무책임'하다고 하죠. 아직 결혼을 안 해서, 먹여 살릴 배우자나 자녀가 없어서 그런 거라고요. 다행히 이런 걸 시작할 때 저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어요. 가진 게 많아질수록 사회적 책임과 의무에 짓눌려하고 싶은 걸 못 하게 되죠. 그래도 어떡해요. 그냥 계속하세요. 추구하다 보면 돈이나 부수적인 것들은 따라와요.
하고 싶은 걸 하는 그에게 사람들은 미성숙하다고 한다. 미성숙은 이따금 무책임, 불완전함의 동의어로도 쓰인다. 옳고 그름의 윤리적인 가치가 없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는 '성숙을 강요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가 공개적으로 기록되는 연예인은 이전의 잘못이 '미성숙해서'였다며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스무 살 첫사랑은 '미성숙해서' 실패한 거라며 미성숙에 그 책임을 돌린다.
미국의 행동과학자·경영학자인 크리스 아지리스는 그의 미성숙-성숙 이론에서 '인간은 미성숙 상태에서 성숙 상태로 성격이 변화하며, 조직에서는 구성원들의 성숙을 추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불완전체에서 완전체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도구의 사용을 배우고, 학문을 공부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다양한 능력과 지식을 흡수하게 되면, 하나의 조직인 '사회'에 알맞은 구성원으로 거듭날지는 모르나 미성숙 상태에서의 발칙한 상상력과 패기는 잃을지 모른다. 이미 얻은 것들을 잃지 않기 위해 점점 앞으로 가야 할 방향 역시 고정되는 탓이다.
충격적인 작품으로 등장했던 작가, 영화감독, 혹은 문화기획자는 그들의 연료에 불을 지폈던 그 천방지축함과 패기를 잃는 순간, 진부한 작품을 내놓게 된다. "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불의의 어둠을 걷어 내는,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직업인이 되겠다고 다짐했던 대한민국의 몇몇 검사들은, 권력을 얻고 그 순수성을 잃자 선서문과 정확히 반대된 삶을 살아가며 휘청거린다.
대한민국의 방향은 고정돼 있다. 모두가 추구하는 바, 향하는 길은 엇비슷하다. 가진 게 없는 자는 성숙을 강요하는 사회의 요구에 순응해 이것저것을 얻어댈 게 아니라 '잃을 것이 없는 자의 패기'가 필요하다. 노홍철의 <철든 책방>은 사양 산업으로 일컬어지는 출판계에 대한 사람들의 새로운 관심을 환기할 터다. 공용 공간에서의 나눔은 낯선 사람들과 내밀한 사연을 공유하며, 그 속에서 얻어지는 공감과 위로의 가치를 깨닫게 할 테다. 영향력 있는 개인의 패기로움은 이처럼 사회에 필수적이지만 도외시되는 가치를 일깨워준다. 힘 있는 사람들의 미성숙함이 더욱 폭발했으면 좋겠다. 그들의 불완전함이 모여 완전으로 표상되는 가치를 전복하길. 아, 여기서 '미성숙함'이란 '무지'나 '무지한 척'과는 엄연히 다른 의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