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척일까, 감각을 유지하는 일은.
코로나 때문이었다.
집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할 용기조차 없었다. 책임지고 싶지 않았고, 책임질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마음 그 자체가 책임지고 싶고, 책임지겠다는 의지였다.
모든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할 수는 없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스스로를 여기저기에 노출시키게 됐고, 코로나는 점점 파져나갔다.
그래서 차를 샀다.
몰랐지만, 항상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말 속에서 나는 부의 측에 서있었다. 그것을 인정할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객관적으로 바라본 나는 늘 부의 측에 서 있었다. 이 사실이 나를 더 불편하게 했다. 난 단순히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는 것. 지나치게 정의로운 척 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정말로 불편했다.
코로나로 인해 더 극명하게 드러난 사회의 여러 가지 '구분'들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면서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한 인간에 대한 애정과 따뜻한 시선을 쉽게 잃어버렸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야말로 애정을 잃어버린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또, 그것을 주체적으로 멈출 수 없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코로나때문에 차를 사게 되었지만, 그것을 사야겠다고 생각하기부터 실제로 사기까지의 모든 것이 내가 말하는 '부'의 원 안에 들어있음을 보여주었기에 처음부터 차에 대한 애정이 생길 리가 없었다.
사회의 빈부격차에 대해 자꾸만 진지하고 심각하게 돌아보게 되던 날들이었다. 그것들은 활자와 이미지로만 다가오는 데 그치지 않고 내 손 위에서 걸어다니고, 내 얼굴 앞에서 얘기했다. 과거 그 어느 때와는 달랐다. 바이러스라는 건 눈에 보이지도 않으면서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 마시는 공기와 물, 환경 그 자체였으며 살아있는 것이었다. 피할 수 없는 것. 운도 확률도 아니었다. 지금 이순간까지도 그렇다. 그저 조심하고 신경쓰며 가능한 빠르게 대처하는 수밖에는 없다.
이 모든 복잡한 생각의 시작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바로 부익부 빈익빈의 '부' 측에 서있는 사람이라는 걸 감각한 데서 왔다.
내가 직장을 얼마간 다녔고,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는 무관했다. 지금의 내가 아니라 날때부터 나는 부익부 빈익빈의 '부' 측에 서있던 사람이었다.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IMF 시대에도 우리 가족은 별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지냈다는 말을 부모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점점 더 명확하게 구분지어지는 사회 구조를 보며 매일 충격받은 마음을 털어놓다보니 나온 말이었다. 충격이 조금 더 마음에 쿵, 소리를 내며 직접 닿았다.
부익부 빈익빈의 '부' 측에 서는 게 죄책감이나 부끄러움 같은 걸 느껴야 할 일은 전혀 아니다. 나는 다만, 항상 내가 '부'라는 분류로 나눠질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 극한의 상황에서야 내가 바로 '부'라는 원 안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오랫동안 몰랐던 사실, 현실을 이제서야 알게 된 놀라움이었을 뿐이다. 굳이 이런 코로나 시대를 맞이해서야 깨닫게 되었다는 게 부끄러웠던 것이다.
누군가는 부하고 누군가는 빈하다. 모두가 동등하기는 어렵다. 수식을 증명하는 것처럼 그에 대한 이유나 설명은 모른다. 다만, 모두가 동등하고자 했던 많은 사회 시스템은 실패하고 붕괴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구분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변화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날때부터 다음 세대를 이어갈 때까지 이어지기 마련이다. 나의 부모님 세대는 '부'하지는 않았는데, 어쩌면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부터 이같은 '원의 유지'가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는 어떠했는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지금부터다. 이제부터 이 원에서, 저 원으로 이동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거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 또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정말 고민이 많이 됐다. 이러한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내 주위에 얼마나, 또 누가 있는지도 잘 알 수 없었다. 부의 원 안에 서 있었지만, 내가 정작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내가 부의 원 안에 있으며 빈의 원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해서는 안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내가 부의 원 안에 서 있다는 감각을 잊지 않는 것. 부의 원과 빈의 원이 나누어져 있으며, 서로 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음을 매 순간, 리고 영원히 감각하는 것이다. 감각을 유지한다면 언제든 쉽게 움직일 수 있다. 지금은 어리둥절하더라도, 언젠가 내가 정말 움직여야 할 순간에 재빠르게 고민없이 움직일 수 있도록 감각을 유지하고 언제든지 준비된 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결론이었다.
물론, 아직도 생각한다. 그걸로 될까?
난 이미 차를 샀는데. 이것을 애정하지
않으며 지금같은 감각을 유지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