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번째 에피소드
달빛이 소담하게 내려앉은 오래된 한옥의 대문이 열리고,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노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흔두 살의 오 여사. 그녀는 평생의 흔적이 담긴 집을 향해 허리를 숙여 마지막 인사를 건넨 뒤, 망설임 없이 문을 잠갔다. 마치 오랜 약속이라도 한 듯, 골목길 어귀에는 이별택시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 택시의 정체를 아는 듯, 평온한 미소와 함께 뒷좌석에 올랐다.
오늘은 김기사가 승객의 사연을 듣는 날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경청하는 밤이었다.
“내 마지막 길동무가 되어주겠소?”
오 여사의 목소리는 세월의 깊이를 품고 있으면서도 소녀처럼 맑았다.
그녀는 다가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평생을 사랑했던 세상과 정중하게 작별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통곡이나 회한이 아닌, 잔잔한 회고담이었다.
“전쟁통에 남편을 만나, 자식 다섯을 낳고... 국수 장사로 그놈들을 다 키워냈지. 내 이름 석 자로 살아본 날은 며칠 없었어.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로 살았지. 그래도 행복했어. 자식들 밥 먹는 소리, 손주들 웃음소리가 내 인생의 가장 좋은 배경음악이었으니까.”
그녀는 삶의 마디마디를 추억했다. 갓 시집와 김장을 담그다 울었던 날, 첫아이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 남편과 부둥켜안고 기뻐했던 날,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의 무덤가에 앉아 홀로 소주잔을 기울이던 날까지.
그녀의 이야기는 한 개인의 역사를 넘어, 이 땅의 모든 어머니가 겪어낸 위대한 서사시였다.
택시는 서울의 야경을 발아래에 둔 채 아차산 중턱의 조용한 도로에 멈췄다.
서울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있는 곳. 그녀가 떠나갈 밤과, 그녀 없이 밝아올 아침의 경계였다.
[ 치유 ] / [ 권고 ]
삶의 모든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은 그녀에게 권고는 무의미했다.
그녀는 자신의 전 생애를 축복받고, 평온하게 마지막 문을 닫을 [치유]를 선택했다.
김기사는 깊은 존경심을 담아, 운전기사로서가 아닌 한 명의 인생 후배로서 입을 열었다. 그가 가진 모든 지혜와 위로를 이 한마디에 담아서.
“제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여사님. 오히려 제가 한 수 배웠습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그녀의 마지막 길을 축복했다.
“인생은 잘 쓴 책과 같아서,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겠지요. 여사님의 이야기는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이제 편히, 마지막 책장을 덮으셔도 됩니다.”
그 말에 오 여사는 평생 처음으로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녀의 모습이 차 안에서부터 서서히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통 없이, 가장 평온한 모습으로 자신의 마지막 페이지를 스스로 덮었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는 작은 국화꽃 한 송이가 남아 있었다.
김기사는 동이 트기 시작하는 하늘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는 오늘 한 사람의 죽음을 목격한 것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완성해내는지를 목격한 것이었다.
삶의 모든 페이지를 사랑과 성실함으로 가득 채운 사람에게,
죽음은 두려운 끝이 아니라 완성된 이야기의 평온한 마지막 문장이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