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다방 : 흔들리는 가장의 무게
“대리요? 네, 지금 갑니다. 압구정 로데오 입구요.”
2025년 1월의 밤바람이 칼날처럼 매서웠다. 이민성(57세) 씨는 패딩 점퍼의 지퍼를 끝까지 올리며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골목을 달렸다.
화려하게 튜닝된 포르쉐 한 대가 굉음을 내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운전석의 젊은 남자가 옆자리의 여자와 키득거리며 지나가는 모습이 슬로모션처럼 민성의 눈에 박혔다.
“저런... 겉멋만 들어가지고.”
민성은 바닥에 침을 뱉으려다 멈췄다. 30년 전, 바로 이 거리의 주인이 자신이었음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1992년. 대한민국에 '소비’라는 신대륙이 열렸던 시절. 민성은 그 유명한 '오렌지족’이었다. 부모님이 졸라매서 번 돈을 물 쓰듯 쓰며, 하얀색 스쿠프를 몰고 "야, 타!"를 외치면 세상 모든 여자가 내 것인 줄 알았던 시절.
지금 그는 남의 외제차를 대신 운전해주고 2만 원을 받는 대리운전 기사가 되어, 자신이 지배했던 거리의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호출지인 클럽 앞으로 가던 중, 골목 안쪽에서 쿵, 쿵, 쿵 하는 묵직한 베이스 소리가 심장을 때렸다.
홀린 듯 고개를 돌리니, 번쩍이는 미러볼 조명이 새어 나오는 낡은 문이 보였다.
시간의 다방 - 90’s Mix
문을 열자마자 자욱한 드라이아이스 연기와 함께 현진영의 '흐린 기억 속의 그대’가 귀청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내부는 영락없는 90년대 '락카페’였다. 촌스러운 형광색 조명, 칸막이 쳐진 소파, 그리고 테이블마다 놓인 맥주병과 과일 안주.
“오셨습니까! 형님! 부킹 한번 하셔야죠?”
웨이터가 현란한 손놀림으로 민성을 안내했다. 나비넥타이에 반짝이 조끼, 그리고 한쪽 손에 든 쟁반.
민성은 눈을 의심했다.
“너... ‘백마’ 아니냐?”
압구정 전역을 주름잡던 전설의 웨이터, 별명 ‘백마’. 민성이 팁으로만 하룻밤에 수십만 원을 쥐여주었던 그 녀석이 30년 전 그 앳된 얼굴로 서 있었다.
“형님, 오늘 물 좋습니다. 형님 스쿠프 앞에 딱 대기시켜 놨습니다.”
백마가 윙크를 날리며 민성을 상석인 창가 자리로 앉혔다. 창밖으로 1992년의 압구정 거리가 보였다.
배꼽 티를 입은 X세대들, 삐삐를 확인하며 공중전화 앞에 줄을 선 사람들, 그리고 거리를 메운 화려한 차들.
“하... 미치겠네. 이게 다 뭐냐.”
민성은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 화려한 파티가 영원할 줄 알았다. 거품이 터지고 IMF라는 지옥이 오기 전까지, 자신은 영원히 늙지 않는 피터팬인 줄 알았다.
“형님, 목타시죠? 주문하신 거 나왔습니다.”
백마가 내려놓은 쟁반에는 양주 대신 커피 한 잔과 선택지가 놓여 있었다.
“설탕을 넣으시면 1992년의 그 뜨거운 밤으로 돌아갑니다. 다시 스쿠프 핸들을 잡고 로데오를 질주하세요. 이번엔 아버지 사업 망하기 전에 미리 돈 좀 빼돌려서 강남 빌딩이라도 사두시면, 평생 떵떵거리고 살 수 있습니다.”
“프림을 넣으시면, 고단한 대리운전은 이제 끝입니다. 형님이 꿈꾸던 편안한 실버타운으로 모십니다. 삭신 쑤시는 일 없이 우아하게 골프나 치면서 사세요.”
“아무것도 안 넣으시면... 다시 저 밖으로 나가서 취객의 차키를 받아야 합니다. ‘어이, 대리 아저씨’ 소리 들으면서, 팁 만 원에 굽실거려야 하는 현실이죠.”
민성은 설탕을 바라보았다. 1992년. 가장 빛나던 나. 두려울 게 없던 나.
돌아가서 아버지를 설득할 수만 있다면. 아니, 내가 좀 더 정신 차리고 살았다면 지금쯤 건물주가 되어 저 젊은 애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텐데.
하지만...
민성의 뇌리에 딸아이의 얼굴이 스쳤다.
사업이 망하고 알코올 중독에 빠졌던 자신을 끝까지 잡아주었던 아내, 그리고 가난 속에서도 바르게 자라준 딸.
“아빠, 나 이번에 장학금 탔어! 아빠 패딩 하나 사줄게.”
지난달, 딸이 아르바이트비와 장학금을 모아 사준 이 패딩 점퍼. 30년 전 자신이 입었던 명품 베르사체 셔츠보다 훨씬 따뜻하고 무거운 옷.
그때의 나는 돈으로 사람을 샀지만, 지금의 나는 땀으로 가족을 지키고 있다.
“야, 백마야.”
민성은 설탕 그릇을 밀어냈다.
“나 안 돌아간다. 쪽팔려서 못 가겠다.”
“예? 형님, 왜 그러십니까? 그 좋던 시절인데요.”
“좋았지. 재밌었지. 근데... 껍데기였어. 아버지 돈으로 폼 잡고, 여자들한테 허세나 부리고. 알맹이는 하나도 없는 썩은 오렌지였다고, 내가.”
민성은 블랙커피를 집어 들었다.
“지금 내가 비록 남의 차 운전해주고 살지만, 내 딸이 사준 이 점퍼 입고 일하는 지금이 훨씬 폼 난다. 이게 진짜 내 인생이니까.”
민성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쓰다. 90년대 락카페에서 마시던 싸구려 캔맥주보다 훨씬 쓰지만, 정신이 번쩍 드는 맛이었다.
“역시 형님, 가오 하나는 여전하십니다. 살아있네!”
백마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90도로 인사했다.
“살펴 가십시오! 형님!”
현진영의 노래가 멀어지고, 민성은 다시 차가운 2025년의 골목에 서 있었다.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콜 배정 완료: 청담동 -> 분당]
“예, 기사님 갑니다!”
민성은 뛰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지나가는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 배는 좀 나오고 머리는 희끗해졌지만, 눈빛만은 1992년의 그 철없던 청년보다 훨씬 깊고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압구정 로데오의 밤은 여전히 길었지만, 이제 그는 길을 잃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작가 노트]
시즌 2의 문을 여는 첫 에피소드는 90년대 초반 풍요의 상징이었던 '압구정 오렌지족’을 소환했습니다. 주인공 민성은 과거의 화려함이 부모의 부에 기댄 허상이었음을 깨닫고, 비록 고단하지만 자신의 땀으로 일구는 현재를 선택합니다. 딸이 사준 패딩 점퍼와 명품 셔츠의 대비를 통해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독자분들에게 그 때의 기억은 달콤하셨을까요? 아니면 다소 씁쓸하셨을까요?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