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무너진 것은 건물만이 아니었다

시간의 다방 : 흔들리는 가장의 무게

by 공감디렉터J


“여보, 나 왔어.”

현관문 도어락 띠띠띠- 소리와 함께 들어선 집. 김정희(59세) 씨는 어깨에 멘 짐을 내려놓을 새도 없이 텅 빈 거실을 둘러보았다. 남편은 아직 퇴근 전, 아이들은 독립해 나간 빈 둥지.

벽에 걸린 94년도 가족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젊은 부부와 갓난아기. 행복해 보이지만, 정희는 안다. 저 사진 속 자신의 웃음 뒤에 숨겨진 공포를.

오늘따라 유독 다리가 저렸다. 비가 오려나.
아니, 10월 21일이 다가오고 있어서다. 몸이 먼저 기억하는 그날의 진동.
정희는 무릎 보호대를 풀며 TV를 켰다. 뉴스에서는 부실 공사 아파트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철근 누락”, “순살 아파트”.
정희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채널을 돌리려다 리모컨을 떨어뜨렸다. 쿵.
그 작은 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바람이나 쐬려고 나선 한강변. 저 멀리 성수대교의 불빛이 보였다. 튼튼하게 다시 지어진 붉은 다리.

하지만 정희의 눈엔 뚝 끊어져 강물로 처박힌 상판과, 뒤집힌 버스의 형상이 겹쳐 보였다.

공원 벤치 옆, 덩굴 식물에 뒤덮인 낡은 컨테이너 박스 하나가 눈에 띄었다.

시간의 다방


들어서자마자 물비린내와 녹슨 철 냄새가 났다.
어두컴컴한 실내, 구석 자리엔 흙탕물에 젖은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웅크리고 있었다.
단발머리, 무학여고 명찰.

“아줌마... 여기 어디예요? 나 학교 늦었는데.”

학생이 고개를 들었다. 창백한 얼굴.
정희는 입을 막았다. 수진이. 옆집 살던, 정희가 친동생처럼 아꼈던 아이.

그날 아침, “언니, 나 학교 다녀올게!” 하며 16번 버스에 오르던 그 아이.

“수진아... 너...”

정희는 다가가 아이를 안으려 했지만, 손이 허공을 갈랐다. 아이는 물에 젖은 환영처럼 차가웠다.

“언니? 정희 언니야?”

수진이가 놀란 눈으로 정희를 바라보았다.

“언니 왜 이렇게 늙었어? 나 기다리느라 늙은 거야?”

정희는 털썩 주저앉아 오열했다.
1994년 10월 21일. 정희도 그 버스에 탈 뻔했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간발의 차로 버스를 놓쳤고, 눈앞에서 다리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은 곧바로 죄책감이 되었다. 내가 탔어야 했는데. 저 꽃 같은 아이 대신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그 후로 정희는 다리를 건너지 못했다. 엘리베이터도 타지 못했다. 세상 모든 단단한 것들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공포 속에 30년을 살았다.

“울지 마, 언니. 나 안 아팠어. 그냥... 좀 추웠어.”

수진이가 파랗게 질린 입술로 웃어 보였다. 그리고 젖은 손으로 쟁반을 밀었다.

“언니, 이제 그만 아파해. 그리고 선택해.”

“설탕을 넣으면 1994년 10월 21일 아침 7시로 돌아가. 언니가 날 붙잡아줘. ‘오늘 학교 가지 마, 떡볶이 사줄게’ 하고 꼬셔줘. 그럼 나 살 수 있어. 우리 같이 늙어갈 수 있어.”

“프림을 넣으면, 그날의 기억을 싹 지워줄게. 다리를 봐도, 버스를 봐도 아무렇지 않게 해 줄게. 트라우마 치료 같은 거 필요 없는, 아주 튼튼한 마음을 줄게.”

“아무것도 안 넣으면... 언니는 계속 기억해야 해. 차가운 강물 속에 잠긴 우리들을. 그리고 무서워도, 다리가 후들거려도, 다시 그 다리를 건너야 해. 그게 살아남은 언니의 몫이니까.”

정희는 설탕을 집으려 손을 뻗었다. 수진이를 살릴 수 있다. 그 끔찍한 비극을 막을 수만 있다면.
하지만... 정희는 멈칫했다.
그녀가 살아남아 낳은 아들, 지금은 건축 설계사가 된 아들이 생각났다.
“엄마, 나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지을 거야. 엄마가 안심하고 잘 수 있는 집.”
아들은 엄마의 트라우마를 보며 자랐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건축가가 되었다.
만약 과거가 바뀐다면, 아들의 그 다짐은, 생명을 지키려는 그 간절한 꿈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리고 수진이의 눈을 보았다. 원망이 아닌, 걱정이 가득한 눈.

“수진아.”

정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나... 널 살리고 싶어 미치겠는데... 내가 도망치면 안 될 것 같아. 내가 그날을 기억하고 증언해야, 다시는 이런 일이 안 생기게 감시해야... 너 같은 희생자가 또 안 나올 거잖아.”

정희는 설탕을 내려놓고, 아무것도 넣지 않은 커피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 내 아들이, 너희들의 희생을 딛고 안전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약속했어. 내가 그 약속을 믿고 지켜봐 줘야 해.”

정희는 쓴 커피를 삼켰다. 차가운 강물처럼 쓰리고 아팠지만, 뜨거운 목 넘김이 심장까지 전해졌다. 그것은 살아있음의 열기였다.

“잘했어, 언니. 역시 우리 언니야.”

수진이가 젖은 교복을 털고 일어났다. 그녀의 주변으로 따뜻한 빛이 감돌았다. 물기가 마르고, 뽀송뽀송한 얼굴의 열일곱 소녀로 돌아와 있었다.

“언니, 나 이제 안 추워. 그러니까 언니도 이제 춥게 살지 마. 따뜻하게 자.”

수진이가 손을 흔들며 빛 속으로 사라졌다.
“잘 가... 수진아. 사랑해.”


정희가 눈을 떴을 때, 다시 한강 공원 벤치였다.
밤공기가 찼지만, 더 이상 공포스럽지 않았다.
정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수대교를 바라보았다. 붉은 조명이 강물 위에 일렁였다.
그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심장이 쿵쿵거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 다리는 무너진 다리가 아니다. 다시 세운 다리다. 우리의 기억으로, 반성으로, 다짐으로 단단하게 연결된 다리다.

정희는 난간을 잡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강바람이 시원했다.
오늘은 집에 가서 아들에게 전화해야겠다.
"밥은 먹었니? 튼튼하게 짓고 있니?"라고.




[작가 노트]
2화는 90년대 중반, 연이은 대형 참사로 무너져내린 대한민국의 안전과 신뢰를 다룹니다. 주인공 정희가 겪는 '생존자 증후군’은 개인의 아픔이자 시대의 상처입니다. 그녀가 과거를 선택해 비극을 회피하는 대신, 고통스러운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것을 택한 이유는 '기억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는 산 자들의 노력, 그리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안전에 대한 다짐. 무너진 잔해 속에서도 피어나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