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다방 : 흔들리는 가장의 무게
“지직, 징-. 아아- 마이크 테스트.”
오래된 카세트테이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박성준(52세) 씨는 홍대 앞, 이제는 멸종 위기종이 된 작은 레코드 가게 앞에 서 있었다. 쇼윈도엔 아이돌 앨범들이 화려하게 깔려 있었지만, 성준의 눈길은 구석에 처박힌 빛바랜 포스터에 머물렀다.
벙거지 모자를 쓴 세 남자.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저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왔다. 1992년 3월.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판도가 뒤집혔던 그날.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성준은 그 충격을 잊지 못한다. 트로트와 발라드뿐이던 세상에 떨어진 핵폭탄. 회오리 춤, 텍 제거하지 않은 옷, 그리고 기성세대를 향한 거침없는 가사.
성준은 지금 평범한 은행 지점장이다. 넥타이를 매고, 고객에게 고개를 숙이고, 실적 압박에 시달리는.
'교실 이데아’를 들으며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를 외치던 반항아는 어디 가고, 순응하는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자신.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딸랑 하는 종소리와 함께 풍경이 바뀌었다.
시간의 다방
좁은 가게 안은 90년대 음반 가게의 냄새로 가득했다.
새 비닐 냄새, 먼지 냄새. 벽면 가득 꽂힌 테이프와 CD들.
카운터엔 뿔테 안경에 뽀글머리를 한, 인상 좋은 주인장이 앉아 있었다.
“어서 와, 성준 학생. 오늘도 서태지 신보 기다리나?”
주인장이 사람 좋은 미소로 물었다. 성준은 멍하니 자신의 교복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헐렁한 힙합 바지, 뉴키즈 온 더 블록 티셔츠.
“사... 사장님? 여기 문 닫으셨잖아요. 2000년에...”
“여긴 1992년이야. 자, 이거 들어봐. 오늘 들어온 따끈따끈한 거야.”
주인장이 내민 쟁반. 거기엔 커피 대신 워크맨과 이어폰, 그리고 세 가지 색깔의 테이프가 놓여 있었다.
“하얀색 테이프를 들으면 1992년 데뷔 무대 방청석으로 보내줄게. 서태지 형님들 실물 영접하고, 팬클럽 회장도 해봐. 공부? 집어치우고 춤추러 다녀. 넌 춤에 소질 있었잖아.”
“노란색 테이프를 들으면, 미래의 네 모습을 보여줄게. 은행 지점장? 나쁘지 않지. 근데 좀 지루해 보이네. 그냥 안정적인 삶에 만족하며 살게 해 줄게. 음악 같은 건 잊고.”
“검은색 테이프를 들으면... 넌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해. 넥타이 맨 아저씨로. 하지만 네 가슴속에 묻어둔 그 비트를 다시 꺼내야 할 거야.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서.”
성준은 하얀 테이프를 만지작거렸다.
춤. 그래, 나도 한 춤 했었지. 학교 축제 때 문워크 한번 하면 여학생들 환호성이 대단했었는데. 부모님의 반대로 춤을 접고 공부를 했고, 그저 그런 대학을 나와 은행에 들어갔다.
만약 그때 춤꾼의 길을 갔다면? 양현석처럼 기획사 사장이 됐을까? 아니면 이주노처럼...
하지만 성준은 문득 지난주 회식 자리가 떠올랐다.
신입 사원들이 노래방에서 요즘 아이돌 노래를 부를 때, 박자도 못 맞추고 탬버린만 흔들던 자신의 모습.
“부장님, 요즘 노래 너무 모르시네~” 하는 비웃음 섞인 농담.
쪽팔렸다. 나도 왕년엔 문화 대통령의 백성쯤은 됐었는데.
“사장님.”
성준은 검은 테이프를 집어 워크맨에 넣었다.
“저 안 돌아갈래요. 춤꾼 박성준? 멋있죠. 근데 은행원 박성준도 꽤 치열하게 살았거든요. IMF 때도 버텼고, 리먼 사태 때도 살아남았어요. 그거, 춤추는 것만큼 빡센 리듬 타기였어요.”
그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치지직... 탁.
귀를 때리는 강렬한 비트. '하여가’의 태평소 소리.
“그리고 저, 아직 안 죽었어요. 우리 딸내미가 요즘 춤 배우거든요. 걔랑 같이 릴스인가 뭔가 찍어보려고요. ‘컴백홈’ 안무, 몸이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성준은 어깨를 들썩이며 리듬을 탔다. 50대 배불뚝이 아저씨의 몸짓이었지만, 그루브만은 살아있었다.
“오, 살아있네! 요~!”
주인장이 디제잉 흉내를 내며 웃었다.
음악이 클라이맥스로 치닫자, 가게 안의 풍경이 소용돌이치며 사라졌다.
눈을 뜨니 다시 2025년의 레코드 가게 앞.
성준은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넥타이를 살짝 풀었다. 그리고 벙거지 모자를 쓴 것처럼 삐딱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태지 형. 나 아직 당신 팬이야.”
그는 핸드폰을 꺼내 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딸, 오늘 저녁에 아빠랑 춤 연습 콜? 아빠가 원조 회오리 춤 보여준다.]
답장은 1초 만에 왔다.
[헐? 아빠 미쳤어? ㅋㅋㅋ 근데 콜!]
성준은 씩 웃으며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발걸음이 ‘난 알아요’ 비트에 맞춰 통통 튀었다.
그의 인생 2막, 이제 진짜 '문화 대통령’은 바로 나 자신이다.
[작가 노트]
3화는 90년대 대중문화의 혁명이었던 '서태지와 아이들’을 통해 X세대의 잠자던 열정을 깨웁니다. 주인공 성준은 안정적이지만 무료한 현재를 살고 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엔 여전히 '저항 정신’과 '흥’이 남아있습니다. 과거로 돌아가 춤꾼이 되는 환상 대신, 현재의 삶에 그 시절의 열정을 접목시키는 결말은 5060 세대가 '꼰대’가 아닌 '힙한 시니어’로 거듭나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은행원 생활도 빡센 리듬 타기였다"는 말은 평범한 직장인들의 삶 또한 예술이었음을 의미하지 않나요?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