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파란 화면 속 채팅, 접속

시간의 다방 : 흔들리는 가장의 무게

by 공감디렉터J

Season 2. 흔들리는 가장의 무게 (1990년대)

제4화. 파란 화면 속 채팅, 접속

“잠시 후 01410으로 연결합니다. 삐- 삐이- 치지직-”

2025년의 퇴근길 지하철. 스마트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최민영(54세) 씨의 귓가에 30년 전 모뎀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카톡, 카톡.’ 쉴 새 없이 울리는 단톡방 알림은 피곤하기만 했다. 영혼 없는 “넵”, "알겠습니다"의 연속.
가슴이 텅 빈 것 같았다.

민영은 눈을 감았다.
1995년. PC통신 ‘천리안’ 채팅방.
파란색 바탕에 하얀 글씨가 깜빡이던 그곳.
얼굴도, 나이도 모르지만 밤새도록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눴던 그 사람. ID ‘장미’.
“가을동화(민영) 님,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당신의 슬픔까지 제가 나눠 가질게요.”
그의 텍스트 한 줄에 위로받고 설레었던 스무 살의 밤.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 낡은 상가 2층 창문에 묘한 파란 불빛이 깜빡였다.

[시간의 다방 - ATDT 01410 Connect]

홀린 듯 계단을 올랐다. 문을 열자 타닥타닥, 기계식 키보드 소리가 빗소리처럼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수십 대의 브라운관 모니터가 내뿜는 푸르스름한 빛.
중앙 카운터, 아니 '운영자석’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뿔테 안경, 더벅머리, 목까지 올라오는 폴라티.
그는 민영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어서 오세요. ID ‘가을동화’ 님. 접속을 환영합니다.”

민영은 숨을 들이켰다.
목소리.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지만, 상상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장미 님.

“당신… 정말 장미 님이에요?”

“그때 번개 모임, 왜 안 나오셨어요? 종로 피카디리 극장 앞. 저 비 맞으면서 3시간 기다렸는데.”

민영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날, 나가지 못했다. 아니, 안 나갔다.
채팅 속의 '가을동화’는 청순가련한 문학소녀였지만, 현실의 최민영은 뚱뚱하고 소심한 취업 준비생이었으니까. 환상이 깨질까 봐 두려워 도망쳤다.

“미안해요… 자신이 없었어요. 실망할까 봐.”

“실망이라뇨. 전 당신의 영혼을 사랑했는데요.”

장미 님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모니터에 선택지가 떴다.

> 명령어를 입력하세요.

“1. GO 1995 (설탕): 1995년 그날, 피카디리 극장 앞으로 돌아갑니다. 이번엔 도망치지 말고 나가세요. 제가 우산을 씌워줄 겁니다. 영화 <접속>처럼 완벽한 해피엔딩을 선물해 드릴게요. 당신은 첫사랑과 결혼해서 알콩달콩 살게 될 겁니다.”

“2. DEL MEMORY (프림): 이 아련한 기억을 포맷해 드립니다. ‘그때 나갈걸’ 하는 후회도, 짝사랑의 아픔도 싹 지우고, 그냥 현실의 남편과 무덤덤하게 사는 삶에 만족하게 해 드립니다.”

“3. LOGOUT (블랙): 다시 현실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기억하세요. 우리가 나눴던 대화는 진짜였다는 걸. 그 추억을 안주 삼아 가끔 소주 한잔 기울이는 중년의 삶으로.”

민영은 모니터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남편과의 결혼 생활. 나쁘진 않다. 하지만 건조하다. 대화라곤 “밥 줘”, "자자"가 전부인.
만약 그때 장미 님을 만났다면? 내 영혼을 알아주는 그 남자와 살았다면?
내 인생은 로맨스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한 번쯤은… 주인공이 되어보고 싶어.’

민영은 떨리는 손으로 키보드를 쳤다.

> GO 1995

엔터키를 탁! 누르는 순간, 모니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가을동화 님?”

1995년 종로 피카디리 앞.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쓴 남자가 민영에게 다가왔다. 헌칠한 키, 지적인 외모. 장미 님이었다.
스무 살의 민영은 더 이상 숨지 않았다.
“네, 제가 가을동화예요.”

남자가 활짝 웃었다.
“반가워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우시네요.”
그는 민영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두 사람의 어깨가 닿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영화도 보고, 시집도 읽으며 사랑을 키웠다.
민영은 다이어트에 성공했고, 작가의 꿈도 이뤘다. 장미 님은 언제나 민영의 1호 팬이었다.

다시 2025년.
민영은 넓은 거실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다.
서재에서 남편(장미 님)이 나왔다. 머리는 좀 희끗해졌지만 여전히 다정한 눈빛.
“여보, 이번 신간 반응이 좋더라. 역시 내 아내야.”
남편이 민영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고마워요, 당신 덕분이야.”

민영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도망치지 않길 잘했다.
내 인생의 장르는 이제 건조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달콤한 로맨틱 코미디니까.
그녀는 노트북을 열었다. 새 소설의 첫 문장을 썼다.
‘접속. 그것은 기적의 시작이었다.’

(4화 끝 - 설탕 선택 / 로맨틱 성공 판타지)

[작가 노트]
이번 화는 **‘설탕(과거 회귀)’**을 선택하여 첫사랑과의 만남을 성사시키는 로맨틱 판타지로 구성했습니다. "그때 만났더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라는 중년의 흔한 상상을 해피엔딩으로 실현해 줌으로써, 독자들에게 설렘과 대리 만족을 줍니다. 뚱뚱하고 소심했던 과거를 극복하고 꿈(작가)과 사랑을 모두 쟁취하는 결말은, 자존감이 낮아진 5060 독자들에게 "나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위로를 건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