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정리해고 통지서와 소주 한 잔

시간의 다방 : 흔들리는 가장의 무게

by 공감디렉터J


차가운 겨울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서울역 광장 한구석, 최진석(58세) 씨는 노숙인들에게 무료 급식을 나눠주는 봉사 텐트 안에 있었다.
“맛있게 드세요. 따뜻할 때 드셔야 합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을 건네는 진석의 손은 분주했지만, 시선은 자꾸만 광장 벤치에 앉은 한 중년 사내에게 머물렀다. 낡은 양복, 풀린 눈, 그리고 손에 들린 소주병.

30년 전, 진석도 저기에 있었다. 아니, 마음은 늘 저기에 있었다.
1997년 12월. 국가 부도. IMF라는 낯선 영어 단어가 내 책상을, 내 명함을, 내 자존심을 송두리째 앗아갔던 그해 겨울.

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골목 어귀의 포장마차 불빛이 유난히 따뜻해 보였다.

시간의 다방 - 실내 포차


천막을 걷고 들어가니 훈훈한 오뎅 국물 냄새와 꼼장어 굽는 냄새가 났다.
플라스틱 테이블, 찌그러진 주전자.
구석 자리에 한 남자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회색 양복, 헝클어진 머리, 책상 위에 놓인 하얀 봉투 하나.

“한잔해. 진석아.”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이동기. 진석의 입사 동기이자, 가장 친했던 친구. 그리고 정리해고 칼바람이 불던 날, 진석 대신 명단에 올라 회사를 떠났던 친구. 그 후로 연락이 끊겼고, 몇 년 뒤 고독사했다는 소문만 들었던 동기.

“동... 동기야!”

진석은 울컥 목이 메었다. 30년 전의 젊은 얼굴을 한 동기는 씁쓸하게 웃으며 소주잔을 내밀었다.

“나 안 죽었어. 여기 살아 있잖아. 니 기억 속에.”

동기가 따라준 소주잔이 찰랑거렸다.

“그날 기억나냐? 인사팀장이 둘 중 한 명만 나가라고 했을 때. 내가 나간다고 했지. 넌 애가 둘이고 난 하나니까, 내가 나가는 게 맞다고.”

진석은 고개를 떨궜다. 비겁했다. 친구가 짐을 싸서 나갈 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못 하고 책상에 코를 박고 있었다. 내가 살았다는 안도감이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죄책감이 평생을 따라다녔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친구야. 내가 나갔어야 했는데.”

“됐어, 인마. 산 사람은 살아야지.”

동기가 젓가락으로 오뎅 국물을 휘저었다. 그리고 쟁반을 가리켰다.

“자, 이제라도 빚 갚을 기회 줄게.”

“소주를 마시면 1997년 12월 그날 아침으로 돌아가. 이번엔 니가 먼저 사표 써. '내가 나가겠다’고 멋지게 말해. 그럼 난 회사에 남아서 임원까지 달고 잘 살겠지. 대신 넌... 저 서울역 노숙자가 될 수도 있어. 감당할 수 있겠냐?”

“안주를 먹으면, 날 잊게 해 줄게. 죄책감 없이, 내가 널 위해 희생했다는 사실도 잊고 맘 편히 살아. 니가 누리는 그 안락한 노후,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맹물을 마시면... 넌 계속 아파해야 해. 평생 나한테 빚진 마음으로, 내 몫까지 짊어지고 살아야 해. 쓴 소주처럼 인생이 쓰겠지만, 정신은 맑겠지.”

진석은 소주잔을 들었다.
돌아가고 싶다. 비겁했던 나를 지우고 싶다. 친구를 살릴 수만 있다면, 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져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희생으로 지켜낸 가족들. 아내의 주름진 얼굴, 번듯하게 자란 아이들. 그 모든 것이 친구의 희생 위에 세워진 모래성 같아서 괴로웠지만, 동시에 너무나 소중했다.
내가 무너지면, 내 가족도 무너진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가장의 무게는 변함이 없었다.

“동기야.”

진석은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나... 못 돌아가겠다. 염치없지만, 나 또 비겁하게 살아야겠다. 내 식구들 때문에.”

진석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대신... 평생 갚으며 살게. 니가 준 이 삶, 헛되게 안 쓸게. 밥 굶는 사람들 밥 먹이고, 추운 사람들 덮어주면서... 그렇게 니 몫까지 살게.”

그는 떨리는 손으로 물잔을 집어 들었다.
아무 맛도 없는, 차가운 맹물. 하지만 그것은 거짓 없는 현실의 맛이었다.

“그래, 그게 최진석이지.”

동기가 빙그레 웃었다.

“잘 살아라, 친구야. 부끄러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니가 행복해야 내 희생도 값진 거다.”

동기가 진석의 등을 툭 쳤다. 따뜻했다.

포장마차 천막이 펄럭이며 찬 바람이 들어왔다. 동기의 모습은 사라지고, 빈 소주잔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진석은 포장마차를 나왔다. 서울의 밤하늘엔 눈이 내리고 있었다.
1997년의 눈은 시리도록 차가웠지만, 2025년의 눈은 포근했다.
그는 옷깃을 여미고 걸음을 재촉했다. 내일 아침에도 서울역에 나가야 했다.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이 누군가게는 생명이 될 수 있음을, 친구가 가르쳐 주었으니까.




[작가 노트]
5화는 90년대 말 IMF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이라는 태풍 앞에 섰던 가장들의 비극을 다룹니다. '생존자’인 주인공 진석과 '희생자’인 친구의 만남을 통해,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과 삶의 의지를 이야기합니다. 진석이 과거로 돌아가 희생하는 영웅적 선택 대신, 비겁하지만 현실을 감내하며 속죄하는 삶을 택한 것은 더욱 현실적이기에 울림도 묵직합니다. "네가 행복해야 내 희생도 값지다"는 친구의 말은 5060 세대가 서로에게 건네는 뜨거운 위로입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