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다방 : 흔들리는 가장의 무게
“할머니, 이거 진짜 금이에요?”
일곱 살 손녀가 반짝이는 돌반지를 보며 물었다. 서혜경(63세) 씨는 장롱 깊숙한 곳, 붉은색 비단 주머니에서 꺼낸 반지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그럼, 진짜 금이지. 우리 강아지 돌 때 할머니가 해준 거야.”
사실 혜경의 장롱엔 금붙이가 거의 없다. 결혼 예물 시계, 목걸이, 쌍가락지... 1998년 그해 겨울, 모두 사라졌다.
TV에서 연일 "나라가 망했다"고 떠들어대던 시절. '금모으기 운동’이라는 캠페인이 시작되자, 혜경은 홀린 듯 장롱을 열었다.
남편의 실직, 아이들의 학비, 불안한 미래. 나라를 구한다는 거창한 명분보다는, 어떻게든 이 위기가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주술 같은 간절함이었다.
손녀를 유치원에 보내고 돌아오는 길, 아파트 상가 금은방 자리에 낯선 간판이 보였다.
시간의 다방 - 금 매입/판매
유리문 너머로 90년대 유행하던 발라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성모의 ‘To Heaven’.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한 광경이 펼쳐졌다.
줄을 선 사람들. 손마다 쥐어진 하얀 봉투, 아기 돌반지, 행운의 열쇠.
저울 앞에서 금 무게를 재고 있는 주인은... 30년 전 그 금은방 사장님이었다.
“어서 오세요, 새댁. 오늘도 뭐 가져오셨나?”
사장님이 돋보기안경 너머로 혜경을 불렀다. 새댁. 그 호칭이 낯설고도 그리웠다.
“저... 팔러 온 건 아닌데요.”
“그때 다 팔고 가셨잖아. 결혼반지랑 애들 돌반지까지 싹 다.”
사장님은 서랍을 열더니 쟁반 하나를 꺼냈다. 그 위에는 혜경이 30년 전 내놓았던 예물들과 돌반지가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이거... 제 거잖아요?”
“그렇지. 자, 다시 기회를 줄게.”
사장님이 커피가 놓인 쟁반을 내밀었다.
“설탕을 선택하면, 1998년 그날로 돌아가. 금 모으기 운동? 바보 같은 짓이지. 금값은 나중에 천정부지로 솟잖아. 그때 안 팔고 묵혀뒀으면 지금쯤 금 테크 해서 꽤 짭짤했을걸. 그 돈으로 남편 기 좀 살려주고, 애들 맛있는 거 더 사줄 수 있었을 텐데.”
“프림을 선택하면, 그냥 지금 시세대로 쳐서 현금으로 줄게. 과거는 잊고, 두둑한 돈 챙겨서 맛있는 거나 사 먹어.”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으면... 넌 그냥 빈털터리로 나가야 해. 나라 구한다고 헌납했던 그 금들, 사실 대기업 빚 갚는 데 쓰였다는 뉴스 보면서 속 좀 쓰리겠지. 그래도 후회 안 해?”
혜경은 반짝이는 쌍가락지를 집어 들었다. 시어머니가 물려주신 가락지. 이걸 내놓을 때 얼마나 울었던가.
이걸 다시 가져가면, 딸아이 시집갈 때 근사하게 물려줄 수 있을 텐데.
그때 왜 그렇게 순진했을까. 나 하나 금 낸다고 나라가 바뀌는 것도 아니었는데.
하지만...
혜경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금은방 앞에 줄을 섰던 수많은 이웃들. 꼬깃꼬깃한 봉투를 꺼내던 할머니, 아이 돌반지를 내밀며 "우리 애들이 살 세상이잖아요"라고 말하던 젊은 엄마.
그건 단순히 금 조각이 아니었다. 희망이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는, 서로를 향한 무언의 위로였다.
그 위로 덕분에 남편은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었고, 우리는 그 지독한 겨울을 버텨낼 수 있었다.
“사장님.”
혜경은 쌍가락지를 다시 쟁반에 내려놓았다. 딸그락.
“저 안 가져갈래요.”
“진짜? 아까울 텐데. 금값이 얼만데.”
“아깝죠. 속도 쓰리고요. 근데요... 그때 내가 그 금을 내놓으면서 빌었던 소원이 있었어요. ‘우리 가족 굶지 않게 해주세요’, ‘우리 남편 다시 웃게 해주세요’.”
혜경은 빈손을 펴 보였다.
“그 소원, 다 이뤄졌잖아요. 비록 반지는 없지만, 우리 식구들 건강하게 잘 살고 있잖아요. 그럼 된 거죠. 그 금값, 밥값은 한 셈이죠.”
그녀는 웃으며 일어섰다.
“그리고 우리 손녀 돌반지는 안 팔고 잘 뒀어요. 그건 우리 손녀한테 희망으로 물려줄 거예요.”
사장님이 빙그레 웃으며 서랍을 닫았다.
“역시 한국 아줌마들은 못 말려. 억척스럽지만 따뜻해.”
다방을 나오자 맑은 햇살이 쏟아졌다.
혜경은 빈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손끝에 닿는 따뜻한 온기.
금가락지는 없지만, 그녀의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가족을 지켜낸 세월이라는 보석이 박혀 있었다.
그 어떤 순금보다 단단하고 빛나는, '어머니’라는 이름의 훈장이었다.
[작가 노트]
6화는 IMF 극복의 상징이었던 '금 모으기 운동’을 소재로 합니다. 당시 국민들의 헌신이 대기업 부채 상환 등에 쓰였다는 비판적 시각도 존재하지만, 작가는 그 행위 자체에 담긴 서민들의 '간절함’과 '연대 의식’에 주목합니다. 주인공 혜경이 금을 되찾는 대신, 가족의 안녕이라는 소원이 이루어진 현재에 만족하는 모습은, 위기를 극복해 온 우리 어머니들의 강인함과 지혜를 보여줍니다. 빈손이지만 결코 가난하지 않은, 마음의 부자들을 위한 소중한 기억입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