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다방 : 흔들리는 가장의 무게
강남역 11번 출구.
마천루들이 숲처럼 우거진 테헤란로.
이병훈(55세) 씨는 화려한 유리 빌딩 숲 사이를 걸으며 목에 건 사원증을 만지작거렸다.
‘보안팀장 이병훈’.
한때 이 거리는 그의 무대였다. 1999년, 닷컴 버블의 광풍이 몰아치던 시절. 그는 벤처 기업의 창업 멤버이자 CTO였다.
“우리가 세상을 바꿀 거야. 인터넷으로 모든 게 연결되는 세상!”
밤새 코딩을 하고,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눈빛만은 혁명가처럼 빛나던 시절.
하지만 버블은 꺼졌고, 회사는 공중분해 됐다. 빚쟁이들에게 쫓기며 그는 코딩 대신 경비봉을 들었다.
지금 그는 자신이 꿈꿨던 미래가 실현된 이 거리에서, 그 미래를 지키는 파수꾼으로 살고 있다.
순찰을 돌던 중, 으슥한 빌딩 뒷골목에서 낯익은 로고가 보였다.
다방 @net
@ 표시가 들어간 촌스러운 간판. 90년대 말 유행하던 사이버틱한 폰트.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서버 돌아가는 웅웅 소리와 함께 쿨링 팬의 열기가 느껴졌다.
내부는 PC방과 사무실을 섞어 놓은 듯했다. 하얀 화이트보드엔 알 수 없는 코딩 언어들이 가득 적혀 있었다.
“어이, 이 이사. 늦었네?”
회의 테이블 상석에 앉아 있는 남자. 뿔테 안경에 떡진 머리, 슬리퍼 차림.
김 대표였다. 병훈과 함께 밤을 새우며 회사를 만들었던, 그리고 회사가 망하자마자 잠적해버린 애증의 동료.
“김... 대표? 너 살아 있었냐?”
“살아 있지. 네 머릿속에, 그리고 이 인터넷 세상 어딘가에.”
김 대표는 킥킥대며 노트북을 두드렸다.
“야, 우리 그때 진짜 미쳤었지. 주식 대박 나면 하와이 가서 살자고 그랬는데.”
그는 병훈에게 쟁반을 내밀었다. 커피 대신 핫식스 캔과 선택지가 놓여 있었다.
“자, 버그 수정(Debugging) 할 시간이다.”
“Enter를 치면 1999년 투자 설명회 날로 돌아가. 그때 그 투자자한테 사기당하지 않게 내가 막아줄게. 넌 성공한 벤처 사업가가 되어 이 테헤란로의 주인이 될 거야. 네가 만든 포털 사이트가 네이버나 카카오를 먹었을지도 모르지.”
“Delete를 누르면, 그 실패의 기억을 삭제해줄게. 벤처니 뭐니 바람 들지 않고 그냥 대기업 전산실에서 정년까지 버티는 안정적인 삶으로 리셋.”
“Esc를 누르면... 넌 다시 경비실로 돌아가야 해. 네가 꿈꾸던 IT 세상의 화려한 주인공이 아니라, 그들의 안전을 지키는 조연으로.”
병훈은 Enter 키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성공. 그 달콤한 단어. 내 아이디어가 세상을 바꾸고, 수천억 자산가가 되는 상상.
내가 만들려던 메신저, 쇼핑몰... 지금 다 현실이 되었다. 단지 주인이 내가 아닐 뿐. 억울했다. 내 청춘을 바쳤는데.
하지만...
병훈은 창밖을 보았다. 불 꺼지지 않는 빌딩들. 그 안에서 야근하는 수많은 젊은 개발자들.
그가 보안팀장으로 일하며 매일 마주치는 그들의 지친 얼굴.
“팀장님, 수고하십니다!” 하며 건네주는 캔커피의 온기.
그는 안다. 저 화려한 성공 신화 뒤에는 수많은 실패와 좌절, 그리고 묵묵히 밤을 지새우는 ‘평범한’ 엔지니어들이 있다는 것을.
자신은 비록 CEO는 못 되었지만, 그들의 열정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고 응원하는 존재가 되었다.
“김 대표.”
병훈은 손을 거두었다. Esc.
“나 안 돌아갈래. 성공? 좋지. 근데 나 지금도 나쁘지 않아.”
“뭐? 경비원이 뭐가 좋다고?”
“야, 이 빌딩 서버실, 내가 지키잖아. 해커들이 공격해도 내가 1차 방어선이야. 내 기술, 녹슬지 않았어. 보안 관제 모니터 보면서 이상 징후 발견할 때의 그 짜릿함, 넌 모를걸?”
병훈은 핫식스를 따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실패해 봤으니까 아는 거야. 지금 저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애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내가 못 이룬 꿈, 쟤네들이 이루고 있잖아. 그거 보는 재미도 쏠쏠해.”
김 대표가 멍하니 병훈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너 진짜... 뼛속까지 엔지니어구나. 그래, 인정.”
김 대표가 노트북을 닫았다. 다방의 풍경이 디지털 신호처럼 0과 1로 분해되며 사라졌다.
“수고해라, 이 팀장. 보안 철저히 하고!”
병훈은 다시 테헤란로 뒷골목에 서 있었다.
밤하늘을 찌를 듯 솟은 빌딩의 불빛들이 별처럼 쏟아졌다.
그는 제복 매무새를 다듬고 무전기를 들었다.
“보안팀장, 순찰 이상 무. 3구역으로 이동합니다.”
그의 발걸음이 당당했다.
그는 실패한 사업가가 아니었다.
디지털 세상의 가장 밑단에서, 가장 묵직하게 이 거리를 지탱하는 '히든 히어로’였다.
[작가 노트]
7화는 90년대 말 '벤처 붐’의 명암을 다룹니다. 테헤란로의 불야성을 만든 주역이었지만, 거품 붕괴와 함께 사라져간 수많은 '이병훈’들을 위한 위로입니다. 주인공은 화려한 CEO가 되는 대신, 실패를 딛고 현실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현재를 선택합니다. "내가 못 이룬 꿈을 후배들이 이루는 것을 지켜보는 기쁨"은 성공지상주의를 넘어선 선배 세대의 성숙한 시선을 보여줍니다. 비록 조연이지만, 자신의 삶에선 당당한 주연인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