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상록수, 그 양말을 벗던 순간

시간의 다방 : 흔들리는 가장의 무게

by 공감디렉터J


“후우, 나이스 샷!”

스크린 골프장 안, 경쾌한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이미연(61세) 씨는 동창들의 환호 속에 골프채를 내려놓았다.
“어머, 미연아. 너 폼 하나는 박세리 저리가라다야.”
친구의 칭찬에 미연은 웃어넘겼지만,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했다.

박세리.
1998년, 온 국민이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맨발로 연못에 들어가 샷을 날리던 그 스물한 살의 영웅.
그 장면을 보며 미연은 펑펑 울었다. 당시 남편의 부도로 쫓겨나 단칸방에서 아이를 업고 부업을 하던 시절. 그 하얀 발이 마치 자신의 처지 같아서, 물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그 눈빛이 동아줄 같아서 울었다.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에 미연은 상가 건물 처마 밑으로 피했다.

빗줄기 사이로 초록색 잔디가 깔린 듯한 입구가 보였다.

시간의 다방 - 18th Hole


문을 열자 풋풋한 잔디 냄새와 비 냄새가 섞여 났다.
실내는 골프장 필드처럼 꾸며져 있었고, 홀 컵 옆에 앳된 얼굴의 캐디가 서 있었다.

“사모님, 샷 하실 차례입니다.”

캐디가 건넨 것은 골프채가 아닌, 낡은 우산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
미연은 숨을 멈췄다. 30년 전, 식당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무장갑을 끼고 있던 자신의 젊은 모습이었다.

“너... 나구나.”

젊은 미연은 씩씩하게 웃으며 땀을 닦았다.
“네, 저예요. 식당 이모 소리 들으면서도, 밤에는 애들 재우고 공부했던 악바리 이미연이요.”

그녀는 발밑의 웅덩이를 가리켰다. 흙탕물 웅덩이. 그 속에 하얀 골프공 하나가 빠져 있었다.

“지금 사모님은 스크린 골프 치면서 웃지만, 저는 이 흙탕물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잖아요. 남편 빚, 아이들 학비, 시댁의 구박...”

젊은 미연이 쟁반을 내밀었다.

“자, 선택하세요. 이 벙커에서 탈출할 방법.”

“설탕을 쓰면, 1998년 부도나기 전으로 돌아가게 해 줄게요. 남편 보증 못 서게 막고, 집 문서 챙겨서 도망쳐요. 그럼 이 고생 안 하고 우아한 사모님으로 살 수 있어요.”

“프림을 받으면, 그냥 이 힘든 기억 다 지워줄게요. 고생 끝에 낙이 온 게 아니라, 원래부터 금수저였던 것처럼 기억을 바꿔드려요.”

“아무것도 안 하면... 당신은 다시 저 흙탕물에 발을 담가야 해요. 양말을 벗고, 차가운 물속에 들어가서 샷을 날려야 해요. 성공할지 실패할지도 모르는 도박을.”

미연은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편안한 골프화.
하지만 30년 전, 그녀의 발은 늘 트고 갈라져 있었다. 식당 물일에 퉁퉁 붓고, 걸어 다니느라 물집이 잡힌 발.
그 발로 버텼다. 박세리가 양말을 벗고 물에 들어갔을 때, 미연도 마음속으로 양말을 벗었다.
‘그래, 까짓것 해보자. 여기서 죽으나 사나 똑같다.’
그녀는 식당 일을 하며 조리사 자격증을 땄고, 작은 반찬 가게를 열어 기적처럼 재기에 성공했다.

지금의 평온한 삶은 로또가 아니라, 그 흙탕물 속에서 건져 올린 승리였다.

“야, 이미연.”

미연은 우산을 접었다.

“나 멀리건 안 써. 컨시드도 필요 없어.”

“왜요? 힘들었잖아요. 밤마다 울었잖아요.”

“그랬지. 근데... 그 물속에 들어가 보니까 알겠더라. 내 발이 생각보다 튼튼하다는 거. 그리고 차가운 물속에서도 중심만 잘 잡으면 공을 날릴 수 있다는 거.”

미연은 흙탕물 웅덩이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신고 있던 골프화를 벗었다. 양말도 벗었다.
맨발. 주름지고 굳은살 박인, 하지만 단단한 60대의 맨발.
그녀는 주저 없이 웅덩이로 발을 담갔다.

첨벙.
차가웠다. 하지만 소름 끼치게 상쾌했다.

“이게 내 인생이야. 질척거리고 차갑지만, 내가 직접 밟고 일어선 바닥이야.”

미연은 물속에 있는 공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골프공이 아니라, 블랙커피가 담긴 작은 잔이었다.

“상록수 노래 알지? 끝내 이기리라. 난 이겼어. 내 방식대로.”

그녀는 커피를 들이켰다. 쓴맛이 온몸의 신경을 깨웠다.

“나이스 샷, 사모님.”

젊은 미연이 박수를 쳤다. 다방 안에 양희은의 '상록수’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떴다.
미연은 다시 스크린 골프장 앞이었다.
신발을 고쳐 신으며 하늘을 보았다. 비 온 뒤의 하늘이 더 맑았다.
오늘 저녁엔 남편과 막걸리나 한잔해야겠다.
“여보, 우리 참 잘 버텼다” 하면서.




[작가 노트]
8화는 IMF 시절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박세리의 맨발 투혼’을 오마주합니다. 주인공 미연에게 그 장면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벼랑 끝에 몰린 자신의 삶을 대변하는 상징이었습니다. 과거의 고난을 지우는 대신, 맨발로 흙탕물에 들어가 위기를 극복해낸 자신의 역사를 긍정하는 미연의 모습이 멋지게 느껴집니다.

"내 발이 생각보다 튼튼하다는 것을 알았다"는 미연의 말은 시련을 통해 단단해진 우리 어머니들의 자존감이 아닐까요?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