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다방 : 흔들리는 가장의 무게
1999년 12월 31일의 밤을 기억하는가.
김철수(60세) 씨는 종로 보신각 앞을 지나며 피식 웃었다.
새해 카운트다운을 기다리는 인파들.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찍느라 여념이 없는 젊은이들.
하지만 철수의 기억 속 1999년의 마지막 밤은 공포와 광기, 그리고 기묘한 적막이 뒤섞인 밤이었다.
Y2K. 밀레니엄 버그. 컴퓨터가 00년을 인식하지 못해 핵미사일이 오작동하고 비행기가 추락할 것이라는 괴담.
그리고... 휴거(携擧).
세상의 종말이 오면 선택받은 자들만 하늘로 들림 받는다는 그 맹목적인 믿음.
철수의 아내는 그 믿음에 빠져 있었다.
“여보, 같이 가요. 오늘 밤이 마지막이에요.”
울며 매달리던 아내를 뿌리치고 집을 나왔던 그날 밤. 철수는 혼자서 세기말의 공포를 술로 달랬었다.
술기운이 올라 비틀거리며 들어선 골목. 낡은 교회 십자가 네온사인이 깜빡이는 건물이 보였다.
시간의 다방 - 종말론 대기실
문을 열자 서늘한 냉기와 함께 찬송가 소리가 들려왔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바닥에 엎드려 기도를 하고 있었다. “주여, 오시옵소서!”
단상 위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흰 양복, 번뜩이는 눈빛.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 사이비 종교의 교주. 아니, 철수의 기억 속 아내를 홀렸던 그 설교자.
“형제님,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방주에 타십시오.”
교주가 철수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엔 성경책 대신 커피 잔이 들려 있었다.
“아내는 저기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당신만 오면 완벽한 구원입니다.”
철수는 주먹을 쥐었다. 저 놈 때문에 가정이 파탄 날 뻔했다. 전세금을 빼서 헌금하려던 아내를 막느라 얼마나 싸웠던가.
“구원? 웃기지 마. 사기꾼 놈.”
“사기라뇨. 믿음이 부족한 겁니다. 자, 선택하십시오.”
“설탕을 선택하면 1992년 10월 28일, 혹은 1999년 12월 31일로 돌아가 아내와 함께 기도원에 들어갑니다. 비록 휴거는 오지 않겠지만, 아내는 당신이 자신의 믿음을 지지해줬다는 사실에 감동할 겁니다. 부부싸움 없는 평화로운 종말을 맞이하는 거죠.”
“프림을 선택하면, 아내의 그 맹목적인 시절을 기억에서 지워줍니다. 그냥 평범하게 살았던 부부로. 당신이 받았던 상처와 배신감도 모두 사라집니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으면... 당신은 기억해야 합니다. 휴거가 불발되고, 허탈하게 집으로 돌아온 아내의 그 텅 빈 눈동자를.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밥을 짓고 빨래를 하던, 그 뻔뻔하고도 안쓰러운 일상을.”
철수는 저쪽 구석에서 기도하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았다.
젊은 시절의 아내. 삶이 너무 고달파서, 현실이 지옥 같아서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어 했던 여자. 그녀에게 종말은 공포가 아니라 구원이었을지도 모른다.
철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밤, 종말은 오지 않았다. 컴퓨터도 멈추지 않았다.
1월 1일의 해는 무심하게 떠올랐고, 아내는 돌아왔다.
철수는 아무 말 없이 콩나물국을 끓여 내밀었다. “밥 먹어.” 그 한마디가 그들의 화해였다.
“이보시오.”
철수는 교주를 노려보았다.
“당신은 틀렸어. 세상은 안 끝났어. 우린 살아서 2025년까지 왔다고.”
“그게 지옥 아닙니까? 늙고 병들고...”
“아니.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도 같이 밥 먹고 TV 보는 지금이 천국이야. 당신이 말한 그 화려한 천국보다, 내 마누라가 끓여주는 김치찌개 냄새나는 우리 집이 훨씬 낫다고.”
철수는 아무것도 넣지 않은 블랙커피를 집어 들었다.
“아내의 그 흑역사? 안 지울 거야. 그때 우리가 얼마나 약했는지, 얼마나 서로를 몰랐는지... 그 기억이 있으니까 지금 서로 더 짠하고 애틋한 거야.”
철수는 커피를 단숨에 마셨다.
“여보! 가자! 집으로!”
철수가 소리치자, 기도하던 아내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이 환하게 웃었다.
“여보...”
다방이 무너져 내렸다. 하얀 옷들도, 교주도, 종말론도 연기처럼 사라졌다.
철수는 다시 보신각 앞에 서 있었다.
“5, 4, 3, 2, 1! 해피 뉴 이어!”
제야의 종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철수는 핸드폰을 꺼냈다.
[여보, 떡국 끓여놨어? 나 지금 들어가.]
세상은 멸망하지 않았고, 삶은 계속된다.
그 징글징글하고도 사랑스러운 일상이 바로 기적임을, 철수는 이제 안다.
[작가 노트]
9화는 세기말의 혼란과 휴거 소동을 통해, 불안했던 시대상과 그 속에서 흔들렸던 가정의 모습을 조명합니다.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종말론에 빠졌던 아내와, 그런 아내를 지켜본 남편. 주인공 철수는 과거의 상처를 지우는 대신, 그 아픔마저 끌어안고 일상을 회복한 현재를 긍정합니다. "지지고 볶는 지금이 천국이다"라는 철수의 말은 허황된 구원보다 소소한 일상의 가치가 더 소중함을 담고 있지 않을까요. 20세기를 끝내고 21세기를 맞이했던 5060 세대의 통과의례 같은 이야기입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