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다방 : 흔들리는 가장의 무게
지하철 분당선 서현역.
수많은 인파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쏟아져 나왔다. 강희성(58세) 씨는 그 물결에 섞여 삼성플라자 광장으로 나왔다.
높은 천장, 화려한 조명. 30년 전, 이곳은 천지개벽의 상징이었다. 논밭이었던 땅에 아파트 숲이 들어서고, '신도시’라는 이름의 유토피아가 건설되던 시절.
희성도 그 꿈을 좇아 이곳에 왔다.
1995년. 갓난쟁이 딸을 안고 입주했던 24평 아파트. 은행 빚이 집값의 절반이었지만, “이제 우리 집이다!” 하며 아내와 껴안고 울었던 밤.
하지만 그 집은 안식처이자 동시에 족쇄였다. IMF 때 금리가 20%까지 치솟았을 때, 매달 월급의 전부를 이자로 바치며 피가 마르는 밤을 보냈다.
“아빠, 여기!”
약속 장소인 시계탑 앞. 서른 살이 된 딸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어? 가자, 엄마 기다리겠다.”
딸의 뒤를 따라가는데, 쇼핑몰 한구석 모델하우스 입구 같은 문이 보였다.
시간의 다방 - 분양 사무소
문을 열자 새 아파트 특유의 냄새. 도배풀 냄새, 새 가구 냄새가 났다.
상담 데스크엔 말끔한 정장을 입은 부동산 중개인이 앉아 있었다.
30년 전, 희성에게 "사장님, 여기 무조건 오릅니다.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사세요"라고 부추겼던 그 김 실장.
“어서 오세요, 강 사장님. 집값 많이 올랐죠?”
김 실장이 계산기를 두드리며 웃었다.
“근데 속은 좀 썩으셨겠어. 이자 내느라, 집값 떨어질까 봐 전전긍긍하느라.”
그는 쟁반 위에 아파트 분양 계약서와 인주, 그리고 커피를 내밀었다.
“자, 재계약하시죠.”
“도장을 찍으면 1990년대로 돌아갑니다. 이번엔 아파트 사지 마세요. 그 돈으로 삼성전자 주식을 사거나, 강남 쪽에 꼬마빌딩을 알아보세요. 그럼 하우스푸어 소리 안 듣고 진짜 부자가 될 수 있어요.”
“계약서 파기를 하면, 빚 걱정 없는 세상으로 보내드릴게요. 집은 없어도 마음은 편한 ‘YOLO’ 족으로. 전세 살면서 여행이나 다니고 즐겁게 사는 거죠.”
“그냥 두면... 넌 여전히 대출금 갚느라 허리가 휜, 하지만 결국 내 집 하나는 건진 평범한 중년이에요. 그 집 한 채가 네 인생의 성적표이자 전부인.”
희성은 계약서를 내려다보았다.
30년. 청춘을 갈아 넣어 지킨 집.
그 집에서 딸이 걸음마를 뗐고,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수능을 봤다. 벽지에 낙서한 자국, 문지방에 키를 잰 자국.
이자 갚느라 외식 한번 제대로 못 했지만, 비 오는 날 천장에서 물 샐 걱정은 없었다. 쫓겨날 걱정 없이 내 가족이 다리 뻗고 잘 수 있는 공간.
“김 실장.”
희성은 계약서를 덮었다.
“나, 주식 샀으면 돈은 더 벌었겠지. 근데... 우리 가족의 역사는 어디에 담아?”
“예?”
“그 24평 아파트. 좁고 낡았지만, 거기가 우리 가족의 우주였어. 내가 밖에서 깨지고 들어와도 날 받아주는 유일한 성이었다고.”
희성은 블랙커피를 집어 들었다.
“대출이자? 징글징글했지. 근데 그거 갚으려고 더 악착같이 살았어. 회사에서 잘릴까 봐 더 열심히 일했고, 술도 끊었고. 그 빚이 나를 성실하게 만들었어.”
그는 커피를 마셨다. 쓴맛. 하지만 든든한 맛.
그것은 '내 집 마련’이라는 꿈을 이룬 가장의 묵직한 자부심이었다.
“그래, 고생했다 강희성. 이 집, 네 훈장이다.”
희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해, 김 실장. 덕분에 잘 살았다.”
다방을 나서자 다시 서현역 광장.
딸과 아내가 저만치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 뭐 해? 배고파.”
“여보, 오늘 당신 좋아하는 초밥 먹으러 갈까?”
희성은 가족에게 걸어갔다.
세 사람은 팔짱을 끼고 쇼핑몰을 나섰다. 밖에는 30년 된 신도시 아파트들이 든든하게 서 있었다.
낡았지만,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 숲을 이룬 아파트 단지.
희성은 자신의 집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저 불빛 하나하나가, 치열하게 버텨낸 가장들의 땀방울임을 알기에.
[작가 노트]
시즌 2의 마지막은 90년대 중산층의 꿈이자 족쇄였던 '신도시 아파트’와 '내 집 마련’을 다룹니다. 주인공 희성은 '부자가 될 수 있는 과거'를 거부하고, 빚을 갚으며 성실하게 일궈온 '가족의 보금자리'를 선택합니다.
대출이자에 허덕였지만, 그 과정이 자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고 가족의 역사를 지켜냈다는 깨달음.
이는 대한민국 5060 세대의 보편적인 정서이자 자부심입니다.
이로써 풍요와 위기가 공존했던 90년대 시즌 2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시즌 3에서는 2000년대, 디지털 혁명과 새로운 문화적 충격 속에서 고군분투했던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