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못 쓰는가?

자유 주제 에세이 모임 적응 실패기

by 무병장수

눈앞에 주전자를 떡하니 두고 “주전자를 꼭 그리지 않아도 됩니다”라는 지시를 들으면, 나는 아마 주전자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주전자를 더 똑바로, 더 정밀하게 들여다보며 묘사하려 애쓸 것 같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면 사람들은 놀랄 만큼 태연하고 자유롭다. 누군가는 피카소처럼 파를 그리고, 누군가는 버지니아 울프처럼 의식의 흐름을 따라 아름답고 서정적인 문장을 써 내려간다.


연필을 쥔 채 ‘뭐야, 왜 주전자를 안 그려?’라며 당황하고 있는 내 옆에서 누군가는 로댕처럼 브론즈를 주조하고, 누군가는 다빈치처럼 비행 장치를 설계하고 있다. 그 장면 앞에서 나는 묘한 좌절감을 느낀다.


틀을 벗어나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음에도 왜 나는 이토록 틀을 벗어나는 것이 어려운 걸까.


사실 나는 글로 먹고사는 사람이다. 임상 평가 보고서를 쓰고, 연구계획서를 작성하고, 의과학 논문을 쓰고 읽고 고친다. 다른 사람의 보고서를 슈퍼비전하고, 논문을 리뷰한다. 이런 나에게 왜 에세이 쓰기는 이렇게 어려운가?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익숙한 글의 성격에 있다. 내가 써온 글은 언제나 제한이 명확한 과학적 글쓰기였기 때문이다.


엄밀한 과학적 글쓰기는 대개 정해진 순서를 따른다. 먼저 핵심 개념을 개념적으로 정의하고, 그 개념을 측정 가능한 조작으로 한정한 뒤, 그 위에서만 가설을 세운다. 이렇게 한 번 고정된 조작은 이후의 모든 문장을 규정한다. 그 바깥으로 나가는 해석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과학적 글쓰기는 자유롭게 ‘잘 쓰는 글’이라기보다 의도적으로 ‘못 쓰게 만드는 글’에 가깝다.

하고 싶은 말을 막고, 넘치는 해석을 제한하고, 애매한 표현을 제거하는 장치가 곳곳에 놓여 있다.


오랜 시간, 나는 주제가 주어지면 제한된 틀 안에서만 논리를 파고들어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 글을 써왔다. 그런 나에게, 오늘의 책이 눈앞에 뻔히 놓여 있는데 그 내용을 무시하고 자유롭게 쓰라는 요구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불편함을 넘어선다. 그 요구는 거의 폭력에 가깝게 느껴진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감정의 즉각적인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이 나는 두렵다. 기질적으로 불안 수준이 높고 걱정이 많은 나는 어떤 생각이나 감정에 붙들리면 쉽게 사념에 휩쓸려 빠져나오기 어렵다. 그래서 ‘아, 생각이 또 흘러간다’ 싶어지면 나는 의식적으로 생각을 멈추고 지금-여기에서 느껴지는 감각으로 돌아오려 애써왔다. 흐름을 따르기보다, 흐름을 차단하며 살아온 셈이다.


이런 이유로 이 모임이 내가 예상했던 방향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뒤 나는 fight or flight 중에서 flight를 선택하기로 했다.


그런데 궁금하다. 이 사람들은 왜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글을 써서 보여주는 걸까? 아마도 감정적인 개인 에세이를 쓰고, 그것이 읽히기를 바라는 욕구는 단일한 동기가 아니라 여러 심리사회적 욕구가 겹쳐 만들어진 것일 것이다.


글쓰기를 통해 흩어진 감정을 하나의 서사로 정리하고, 이해 가능한 경험으로 통합한 뒤, 그것을 타인과 공유함으로써 자신이 부여한 의미가 내 안에서만 유효한 환상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통용될 수 있음을 확인받는 것. 너무 친밀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다정하고, 글을 읽을 감수성을 가진 낯선 사람들로부터 피드백을 받는 일은 상처받지 않을 거리에서 연결을 경험하는 아주 정교한 방식처럼 보인다.


결국 감정적인 개인 에세이를 쓰고 그것이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이 감정이 나만의 착각이 아니라, 타인과 이어질 수 있는 인간적인 경험임을 확인받고 싶은 욕구”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 욕구를 대면 상황에서 감당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그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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