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하게 버틸 수 있는 태도와 환경의 상호작용
"OO님, 진짜 성실하게 운동 잘 나오시네요, 이렇게만 계속하시면 XX구에서 가장 강인한 여성이 되실 것 같아요"
그날도 겉으로는 평온하게 몸을 푸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수업이 빨리 시작되기만을 바라며 초조해하고 있는 내 앞으로 조각같이 군더더기 없고 완벽한 신체를 가진 남자 선생님이 다가왔다. 그는 바위처럼 단단한 신체와는 어울리지 않게, 소년처럼 티 없이 밝고 환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올려 주었다.
미성숙했을 때의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어른들에게 애교를 부리며 칭찬을 구걸했고, 어느새 그 칭찬에 중독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돈을 벌기 시작하자 '잘하는 것'은 기본값이 되어 버렸고, 나를 칭찬해 줄 어른들은 사라졌다. 그 빈자리를 대신하듯 물질이나 타인에게 과시할 수 있는 경험들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소금물을 마시고 있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아가야 할까?
아직도 정확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다만 지금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최선을 다해 해내되 외현적인 칭찬이나 성과 자체에 매달리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깨닫고 이해하며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고 괴테나 카뮈, 프롬처럼 타인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위버맨쉬하거나 부조리에 반항하며 나만의 인생을 창조하면서 살기도, 소유가 아닌 존재하는 삶을 향해 나아갈 만큼 강인하지도 않다. 방향이 옳았더라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여전히 흔들리고, 괜한 일을 벌인 것 같다는 생각에 결국은 내가 무능해서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는 자괴감에 빠진다.
'강인한 여성이라니'
삶을 살아오면서 '강인하다'는 형용사가 나에게 쓰일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듣고 보니, 참으로 멋진 칭찬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어서 기뻤던 것도 물론 크다. 마치 기대 없이 우연이 산 로또가 소액에 당첨된 것 같은, 혹은 큰맘 먹고 먹은 고가의 코스요리가 생각보다 헛헛해 아쉬워하던 찰나에 훌륭한 디저트가 서비스로 나온 것 같은 행운.
하지만 이 말이 기쁘게 다가온 가장 큰 이유는, 그 칭찬의 근원이 내가 우월하다는 평가가 아니라, 내가 쌓아온 노력 그 자체에 기반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회사를 다니면서, 또 여러 가지 일을 벌여 놓은 상태에서 주중에 퇴근 후 운동을 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킥복싱을 등록하며 나 스스로에게 세운 원칙 중 하나는, 최소의 필요조건만 충족하고 충분조건들은 과감히 소거하는 것이었다.
내가 정한 필요조건은 단순했다. 주 3회, 최소한 2회는 어떤 일이 있어도 체육관에 가는 것, 그리고 수업 시간만큼은 그 자체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반면 충분조건은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체육관에서 굳이 친구를 사귀려 애쓰지 않는 것, 수업 전후로 예습과 복습을 하거나 동영상을 찾아보며 더 잘하려는 부가적인 노력은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능력이나 사회성이 부족한 개인이, 최소한의 조건만 성실히 충족하는 것만으로도 과연 변화가 일어나는지 그 여부를.
매번 가기 싫은 수백 가지의 이유를 억제해서 누르고 성실하게 주어진 몫을 해내다 보니, 어느 순간 몇 가지 자세들은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몸에 남아 있었다. 나의 꾸준함과 전문적인 선생님들의 세심한 지도도 있었지만, 같은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선배 체육인들의 실질적인 조언과 도움 역시 큰 몫을 했다.
어느 정도 실력이 쌓이자 선생님은 나를 체육관의 고인물과 짝지어 주었다. 상대 역시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내어 운동하러 왔을 텐데, 나 같은 쪼랩과 짝이 되어 운동 시간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싶어 시작부터 전전긍긍했다. 최대한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기계처럼 선생님이 알려준 킥복싱 콤보 순서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동시에, 혹시 내 하찮은 잽이나 킥 때문에 상대가 다치지는 않을까 싶어 힘을 제대로 실지도 못했다.
나와 짝이 된 고인물 체육인은 내 자세를 한번 쓱 훑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받아주는 입장에서 상대가 세게 안 치는 게 더 불편해요. 어차피 서로 리듬을 주고받는 거니까, 그냥 세게 치세요"
"아, 네…"
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듣고 있자, 그는 독려하듯 말을 이었다.
"저도 지금 이거 한지 이제 20년 됐어요. 지금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 시간이 쌓여서 그런 거죠. 예전에 저는 훨씬 더 못했어요. 한두 달 하고 이 정도면, 정말 잘하시는 거예요"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위로를, 자신이 실제로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쌓아 온 성취에 겹쳐 건네주자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 말은 막연한 격려가 아니라, 시간을 통과한 사람이 건네는 증언이니까.
"그리고 콤보도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서로 치고 방어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서 해야 해요"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잽을 치면, 어느 쪽으로 피하겠어요?"
육중한 오른손이 내 왼쪽 얼굴을 가르며 들어오자, 나는 턱을 당기고 몸을 왼쪽으로 비켜 세웠다.
"그렇죠, 그리고 때리는 입장에서도, 오른손으로 칠 때 그냥 주먹만 쓰는 게 아니라 이렇게 어깨가 연결되고, 동시에 허리랑 발까지 같이 돌아가면서 들어가면 힘이 훨씬 실리겠죠?"
"오오오오"
그동안 나는 각 자세의 이름과 동작을 외우는 데 급급해, 하나하나의 동작을 겨우 한 조각의 chuck로 만들어 붙들고 있었을 뿐, 그 사이를 흐르는 전체적인 맥락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전문적인 선생님이 이런 설명을 해주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선천적으로 하나를 알면 열을 깨닫는 운동 천재의 설명보다, 어쩌면 수년 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평범한 사람이 오랜 시간과 노력을 거쳐 경지에 이르러, 자신의 초보자 시절 기억을 불러 내며 건네는 설명이 훨씬 더 또렷하게 와닿았다.
두 달 동안 나는 좌절감과 무능감에서 비롯된 산만함과 충동적인 행동 욕구를 억누르고, 최대한 튀지 않는 모습으로 성실하게 체육관에 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내게 주어진 몫만을 묵묵히 해냈다. 이 시간은 단순히 나 개인의 성장에만 그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안전하고, 예측 가능하며, 함께 있어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는 과정이기도 했기에 이같은 따뜻한 배려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강한 자극은 짧은 시간 많은 이목을 끌기에는 효과적이지만, 그만큼 호불호도 쉽게 갈린다. 내가 튀는 이상치일수록, 내 안에서 피어오르는 충동이나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욕구를 즉각적으로 표출하기보다는, 한동안은 그것을 눌러 두고 조용히 주어진 일을 해내는 편이 필요하다. 그래야 주변 사람들은 나를 위험한 존재로 경계하지 않고, 필요할 때 적확한 도움을 건넬 수 있다. 그리고 그 도움을 발판 삼아 나는 조금 더 성장할 수 있고, 보다 건강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여지도 생긴다.
나의 고슴도치군도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해야 할 행동을 설명하면 이해하고, 규칙도 정확히 말로 돼 됐고, 숙제를 하기로 나와 손가락 걸고 약속도 했다. 그럼에도 그 순간이 되면 몸이 먼저 튀어나가고, 충동이 앞서며, 관계를 고려할 여유는 사라진다. 우리는 종종 그것을 ‘태도의 문제’로 오해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러한 아이들에게는 애초에 그 태도가 가능해지는 조건 자체가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다.
나 역시 알고도 하지 못하지 않았던가? 예를 들어 파리를 손으로 죽인다던지, 사실 죽인 시체를 선생님에게 체육인들에게 보여주며 자랑하고 칭찬받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느라 무진 애를썼다. 다만 성인이 된 나는, 즉각적인 인정과 자구를 의도적으로 차단하고, 기준을 최소한으로 낮추며, 실패해도 괜찮은 환경을 스스로 만들 수 있었다. 그 조건 위에서야 비로소 ‘튀지 않고 성실하게 버티는 태도’가 가능해졌다. 그러니 그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훈계나 설명이 아니라, 그 태도를 가능하게 만드는 구조와 시간, 그리고 안전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