킥복싱장의 이상치(outlier)-4

나는 어떻게 맨손으로 파리를 죽일 수 있었을까?

by 무병장수

전신 거울 앞에 선생님과 나란히 서서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바라봤다.

적나라하게 밝은 형광등 아래에서 왜곡 없이 온전히 반사된 나의 전신이, 전문가의 눈 속에서 낱낱이 탐색되고 파헤쳐지는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왔다. 어깨가 움추러드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애써 당당한 척 어깨를 폈다.


조각같이 아름다운 선생님은 나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치자 씽긋 웃어 보였다.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왼발을 한 발 정도 앞으로 두세요. 상체는 긴장을 툭 풀고 편안하게 세워주세요. 그 상태에서 왼발과 오른발을 번갈아 가볍게 들었다 내려놓으며, 제자리에서 걷듯이 리듬을 타면 돼요. 이게 기본 스텝이에요."


선생님은 기본 스텝부터 알기 쉽게, 아주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어깨의 힘을 빼고 앞뒤로 스텝을 밟는 데에만 주의를 두자, 몸이 조금씩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기본 스텝을 밟는 나를 바라보던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발은 바닥을 세게 찍지 말고 가볍게, 상체는 흔들리지 않게 중심을 유지합니다. 좋아요"

'좋다니!'

짝사랑하는 사람의 손끝이 스쳤을 때처럼,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얼굴에 번졌다. 콧구멍이 살짝 벌렁거리고,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고작 스텝 몇 번 밟아보고 수월하다고 느꼈을 뿐인데, 처음 수학 학원에 가서 긴장한 채 레벨 테스트를 봤더니 예상보다 쉬운 문제만 나왔을 때의 희열이 차올랐다. 그냥 추임새 같은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그 사소한 긍정의 단어에 악착같이 달라붙어 의미 부여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 걸,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요. 이제 주먹을 가볍게 쥐고 얼굴 옆에 붙여 가드를 올립니다. 턱은 살짝 당겨 얼굴을 보호하고, 팔꿈치는 너무 벌어지지 않게 몸통 쪽으로 둡니다. 상체는 앞으로 과하게 숙이지 말고, 허리는 곧게 세운 채 어깨의 힘을 빼주세요."


선생님이 바로 옆에서 모범 자세를 보여주며 설명했지만, 내 모습은 벼랑 끝에 몰린 생쥐가 하찮게 가드를 올리고 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그 장면을 전신 거울로, 그것도 선생님과 나란히 보고 있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완벽한 선생님과 하찮은 나의 자세를 번갈아 확인할 때마다 선명해지는 광대한 격차. 당연한 차이인데도, 마치 내 0점 자리 성적표가 전시된 것을 모두 함께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 성적표가 다름 아닌 거울 속 내 몸이라는 사실, 물리적 세계에서 나라는 존재를 가장 명확하게 증명하는 신체가 0점짜리라는 느낌이 나를 더 괴롭게 했다.

선생님의 카리스마 넘치는 기본자세와 나의 뻣뻣하고 허술한 자세가 적나라하게 대비될수록 긴장은 더 높아졌고, 뭐부터 고쳐야 할지 몰라 오히려 더 우왕좌왕했다.

'주먹은 이렇게 쥐는 게 맞나? 얼굴 어느 쪽에 붙여야 하지?'


선생님은 당황하는 나를 보고 모범 자세를 풀고 내게 가까이 다가와, 마치 연필을 처음 쥐는 법을 가르치듯 하나씩 교정해 주었다.

"먼저 2345번 손가락을 바락을 두르듯 플랫 하게 접고, 엄지는 이렇게 네 손가락 안쪽으로 둬요. 엄지가 이렇게 밖으로 나와서 때리면 손가락 다쳐요"

그녀는 2345번 손가락 위로 불쑥 튀어나와 있던 내 엄지를 자연스럽게 아래로 옮겨주었다.

"주먹은 너무 세게 쥐지 말고, 손목과 일직선이 되도록 편하게 유지합니다. 그렇죠, 좋아요. 이제 기본 주먹으로 손을 쥔 상태에서, 주먹을 광대 옆 정도 높이에 두고, 턱은 살짝 당겨야 얼굴이 보호돼요. 좋아요, 팔과 어깨에 힘을 주지 말고 편안하게 둔 채, 상체는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다리만 가볍게 움직입니다. 그 상태에서 왼발과 오른발을 번갈아 가볍게 들었다 내려놓으며, 제자리에서 걷듯이 리듬을 타며 자연스럽게 스텝을 밟으면 돼요"


선생님의 미시적이고 섬세한 도움 덕분에, 제대로 쥐어진 주먹을 제자리에 두고 아장아장 스텝을 밟는 내 모습은 아까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이 자세가 근육 기억에 잘 저장되길 바라며, 나는 이 동작만 계속 반복하고 싶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몇 번 더 스텝을 밟아보게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고, 곧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기본자세 알았으니까, 원투 펀치 알려드릴게요"

"아니요, 선생님. 저는 오늘은 스텝만 익숙해지고 가고 싶은데요"

내 수준을 아는 나는 서둘러 선생님의 진도를 막아섰다. 그러나 선생님은 씽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원투 스텝은 쉬워요"

'너한테나 쉽겠지...'라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한 채, 나는 선생님을 무기력감 70%, 열의 30%의 몰입도로 바라보았다.


"지금이 기본 가드 자세인 거예요. 가드를 유지한 상태에서 스텝을 가볍게 밟으며 원을 치는 거예요"

그녀의 오른손이 위협적으로 쭉 뻗었다가 정확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짱멋있다.'

너무 멋있어서 방청객처럼 박수를 치며 선망의 눈으로 선생님을 바라봤다. 그 눈빛을 강의를 지속해도 된다는 뜻으로 오해했는지, 선생님은 정보의 홍수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원은 앞손 스트레이트예요. 앞발이 살짝 바닥을 누르면서 앞손을 정면을 곧게 뻗어주세요. 이때 어깨가 턱을 살짝 가려주고, 팔꿈치는 너무 벌어지지 않게 가볍게 툭 치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거예요. 이어서 투는 뒷손 스트레이트예요. 뒷발 뒤꿈치가 살짝 들리면서 골반과 상체가 함께 회전하고, 그 힘으로 뒷손을 곧게 뻗는 거예요. 타격 후에는 몸이 앞으로 쏠리지 않게 중심을 유지하면서, 뒷손도 즉시 가드로 복귀하는 거예요. 이렇게"


선생님은 완벽한 모범 동작을 보여주었고, 나는 최대한 따라 하려 애썼다. 그러나 내가 겨우 해낸 것은 손을 뻗었다가 되돌리는 원투에서 가장 겉으로 드러나는 동작뿐이었다.

선생님의 원투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면, 내 하박은 힘만 잔뜩 들어간 채 어색하게 앞으로 뻗었다가 되돌아왔다.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통나무 할아버지가 뻣뻣한 양 팔로 힘겹게 기지개를 켜듯, 두껍고 묵직한 가지가 하나씩 힘겹게 뽑혔다가 다시 힘겹게 제자리로 돌아와 박히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레드플래그. 레드플레그.'

정보 과부하다.

내 뇌가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을 넘어서는 정보가 동시에 유입되고 있다.

Miller의 법칙에 따르면, 인간의 작업 기억은 한 번에 약 7개(±2)의 정보 단위(chunk)를 처리할 수 있다고 한다. 선생님이 생각하기에 기본 스텝과 원투, 두 개의 정보 단위 일 수 있고, 많게는 스텝, 가드, 주먹, 원투 네 개의 정보 단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단순히 정보의 개수만 문제가 아니다.

주먹을 쥐는 것, 쥔 주먹을 얼굴 위치에 유지하는 것, 그 상태에서 스텝을 밟는 것, 그리고 이러한 의미적 정보(semantic information)를 근육 기억(muscle memory)에 연결하는 과정은 각각 별개의 처리 단계를 요구한다.

결국 각 단계가 서로 곱해지듯 중첩되면서, 이미 나의 뇌는 정보 처리 용량을 초과한 과부하 상태에 놓여 있다.


정보 과부하 상태에 들어가면, 뇌는 자동적으로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을 중심으로 한 조절 체계를 가동해 현재 수용 가능한 정보의 양을 선별하고, 처리 우선순위를 재조정하려 한다. 전전두엽은 작업기억의 용량을 관리하고, 불필요한 자극을 억제하며, "지금은 무엇만 처리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핵심 조절자 역할을 한다.

문제는 이 시점에 모든 정보를 놓치지 않고 완벽하고 처리하고 싶다는 욕구가 동시에 활성화될 때 발생한다. 이는 전전두엽의 선택적 억제 기능과 개인의 성취 욕구적 동기가 충돌하는 상태이다. 뇌는 처리 용량을 줄이려 하는데, 주관적 욕구는 처리량을 늘리라고 압박하는 것이다.


이 격차가 커질수록 편도체(amygdala)가 위협 신호를 감지하여 불안 반응을 증폭시킨다. "놓치면 안 된다, " "지금 못하면 안 된다"는 인지적 해석이 위협으로 재구성되면서, 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되고, 각성 수준이 급격히 상승한다. 이때 불안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인지 자원을 잠식하는 상태로 작동한다.


불안이 증가하면 전전두엽의 상위 조절 기능은 오히려 약화된다. 전전두엽은 안정적인 각성 수준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하는데, 과도한 각성은 주의의 폭을 좁히고 작업기억을 붕괴시킨다. 그 결과, 어느 정도 자동화되어 있던 동작들-기존에 잘 수행하던 자세나 리듬-까지 다시 의식적 통제의 대상으로 끌어올려지게 된다. 이 순간 뇌에서는 역설적인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원래는 기저핵(basal ganglia)과 소뇌(cerebellum)를 중심으로 자동화되어야 할 운동 패턴이, 다시 전전두엽의 세밀한 감시 하에 놓이면서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진다. 흔히 말하는 '생각하면 더 못하는 상태'가 바로 이 지점이다. 평소엔 잘 걷던 계단인데 누가 지켜보는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괜히 보폭을 조절하다가 발을 헛디디게 되듯, 자연스럽게 잘하던 발표를 상사나 존경하는 사람이 앉아 있는 날엔 “오늘은 인상 남겨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평소엔 안 하던 손짓 강조를 넣다가 말이 꼬이듯, 운동기억(muscle memory)이 작동할 공간이 불안과 과잉 통제로 잠식되면서, 동작은 끊기고 자세는 무너진다.


즉, 정보 과부하 상태에서의 수행 저하는 능력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전전두엽의 선택적 처리 요구와 모든 것을 완벽히 처리하고자 하는 욕구의 간극에서 증폭된 불안이라는 삼각 구도 속에서 발생한 뇌 기능의 일시적 붕괴에 가깝다.

이 상태에서 회복의 핵심은 더 많은 정보를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전전두엽이 다시 '지금 이것만 처리해도 안전하다'라고 판단할 수 있도록 처리 단위를 의도적으로 줄이고, 불안을 낮춰 자동화 회로가 다시 작동할 여지를 확보하는 것이다.


급격히 무너진 내 자세를 보고 깜짝 놀란 듯,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조각같이 아름다운 선생님에게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저에게 시간을 좀 주세요. 혼자 연습하다가 모르는 것 있으면 여쭤볼게요. 다른 분들한테 가셔도 돼요"

선생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를 홀로 남겨둔 채 다른 회원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전신 거울 앞에 혼자 선 나는, 방금 배운 자세들을 하나씩 곱씹으며 내가 소화한 동작만 골라 반복해 보기로 했다. 처음 비교적 잘 해냈던 기본 스텝부터 단계별로.

발에 주의를 두었다가, 주먹으로 옮기고, 다시 중심이 되는 부위로 한 단계씩 초점을 이동시켰다. 그러다 전체 자세를 확인하려고 거울에 비친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순간, 적나라하게 드러난 내 모습 뒤로 다른 회원들의 동작이 함께 반사되었다.

나비처럼 날아오르다 벌처럼 정확히 꽂히는, 이미 몸에 완전히 밴 그들의 멋진 포즈들. 그들과 나 사이에 놓인, 너무나 당연한 격차.

그 차이를 외면하지도, 애써 줄여 보려 애쓰지도 않은 채 스스로를 달래며 다시 움직이려 했지만, 너무 잘 보이는 그 격차를 견디며 계속해 나가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힘에 부쳤다.


그때 다른 남자 선생님이 전기 파리채를 들고 파리를 쫓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엄지손톱만 한 파리 한 마리가 체육관을 유유히 날아다녔고, 다부진 체력의 선생님이 그 파리를 날렵하게 따라붙었지만 번번이 놓치고 말았다.

나비처럼 날아오르다 벌처럼 정확히 꽂히는 완벽한 자세로 쉐도우 복싱을 하던 킥복싱 고인 물조차, 시야 앞을 유유자적 가로지르는 파리에 깜짝 놀라 자세를 흐트러뜨렸다.

"여기요, 여기"

그들은 파리채를 든 선생님을 따라다니며, 마치 위협적인 멧돼지의 위치를 보고하듯 파리의 좌표를 연신 외쳤다. 그러나 파리는 늘 한 박자 먼저 빠져나갔다.

어디서 들어왔을지 모를 파리 한 마리가 킥복싱 몰입을 방해하다가, 쉬는 시간을 알리는 휘슬이 울리자 모두가 자세를 풀었다. 물을 마시거나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며, 체육관 전체의 주의는 느슨하고 편안하게 분산되었다.


그때,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 순간. 나를 비추는 전신 거울 위에 통통한 파리가 육중하고 반짝이는 몸을 드러내며 턱 하고 앉아 여유롭게 다리를 비볐다.

나는 몇 초간 그 파리를 빤히 바라보다가, 거리낌 없이 맨손바닥으로 퍽 하고 파리를 눌러 죽였다.

손바닥에 퍼석한 감각이 전해지고, 곧 촉촉한 내장의 촉감이 번졌다. 나는 손바닥을 뒤집어 약간의 피와 노란 내장이불을 덮은 납작해진 검은 파리의 최후를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어떤 욕구가 끓어오르려 했다. 그 욕구에 잠식되 충동적 행동을 하게 되기 전에 서둘러 탈의실로 가 사체를 조용히 처리했다.


평소 깔끔을 떠는 나는, 어떻게 맨손으로 파리를 죽일 수 있었을까?

너무 잘 해내야 하는 목표가 아득하게 멀어 보일 때, 무력감과 좌절감 속에서 나는 어떻게든 내가 무언가를 해냈다는 증거, 내 존재의 필요를 증명하고 싶었던 걸까?

그렇다면 수업 중 수업 내용에는 집중하지 못한 채, 교실 벽의 작은 crack을 발견해 선생님에게 보고하는 ADHD 아동의 모습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산만함이 아니라, 통제 불가능한 세상 속에서 최소한 하나라도 붙잡아 보려는 시도, "나는 여기 있다"는 신호였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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