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은 태어나서 고통받다 죽는다
요즘 사람들이 불행한 이유는, 삶은 본질적으로 고통이라는 인생의 가장 오래된 진리를 모른 채 살아가기 때문인 것 같다. 성경에서는 “이미 죽은 자들이 아직 살아 있는 자들보다 더 복되고, 이 둘보다 더 복된 자는 아직 나지 아니한 자”라고 말하며(전 4:2–3), 삶을 낭만화하지 않는다. 불교 역시 마찬가지다. 석가모니는 윤회 속에 태어나는 것 자체가 고통의 연속이기에, 가장 바람직한 상태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 즉 불생(不生)의 상태, 곧 열반이라고 보았다.
이 오래된 통찰은 문학에서도 반복된다. 인간의 굴레에서 서머싯 몸이 그려낸 필립 캐리의 삶은, ‘행복해지기 위해 애쓰는 인간이 어떻게 더 깊은 고통에 빠지는가’를 집요하게 보여준다. 선천적 장애로 인해 일찍부터 열등감과 소외를 경험한 필립은, 종교/예술/지성/사랑/직업이라는 이름의 여러 ‘의미’를 붙잡으며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는 무언가에 매달리면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 믿지만, 결과는 늘 반대다.
특히 필립이 밀드레드에게 집착하는 관계는 상징적이다. 이성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녀를 향한 열정이 사랑이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기대는, 그를 자유롭게 하기보다 더 단단한 굴레로 묶는다. 그는 스스로 고통을 선택하면서도, 그 고통이야말로 삶을 특별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 착각한다. 그러나 소설이 끝에 가까워질수록 분명해지는 것은 이것이다. 필립을 괴롭힌 것은 삶의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원하는 바를 얻음으로써 고통을 제거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전도서와 불교의 통찰은 다시 살아난다. 삶이 원래 고통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필립은 사랑/성공/여행으로 표상되는 자아실현이라는 이름의 허상에 그렇게까지 매달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행복해져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 강박이야말로 그를 가장 깊이 얽어맨 굴레였다.
오늘날의 인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인다. 조금만 더 성취하면, 조금만 더 성공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그러나 그 약속이 좌절될 때, 사람들은 필요 이상의 고통을 겪는다.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고통인데, 여기에 실패한 꿈과 비교, 자기혐오라는 추가적인 고통을 덧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어리둥절해진다. 왜 이렇게까지 괴로운지 이해하지 못한 채 말이다.
인간의 굴레에서가 조용히 도달하는 결론은 의외로 담담하다. 삶의 의미를 반드시 찾아야 할 필요는 없으며, 고통 없는 삶을 기대하지 않을 때 오히려 숨이 트인다는 것. 이는 불교가 말하는 집착의 소멸과 닿아 있고, 전도서가 보여준 냉정한 인생의 이해와도 겹친다. 삶이 고통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불필요한 고통을 덧붙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지난한 고통을 견뎌내는 순간은 내 인생이라는 카펫의 패턴을 직조하는 과정이고 그 패턴의 아름다움은 고통을 견뎌낸 이후에 나 확인할 수 있으니 그저 견뎌내야 한다.
그래서 어쩌면 자유란, 행복해지겠다는 욕망에서 벗어나는 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필립이 조금 늦게나마 깨달았던 것처럼, 삶은 구원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견디며 지나가야 할 과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굴레는 느슨해진다.